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12.8 토 16:17
기획
[문화] 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간길혜민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채태준 편집위원  |  ctj35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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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승인 2018.12.05  0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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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여기에서 재현을 비평한다는 것 ④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비평]

  ‘아직도 그 이야기야?’ 지금-여기에서 재현에 관해 비평할 때 피할 수 없는 볼멘소리다. 재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게 ‘도식적인 문제 제기’로, 재현에 대한 비평은 ‘도식적인 비평’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재현의 문제 제기에 있어서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지양해야겠지만, 현실의 맥락을 소거한 채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는 것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올바른’ 언표에 기댄 몰-맥락적인 근본주의가 아닐까. 다양한 매체-장르의 연구자들로부터 재현/재현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비평적 백래시와 페미니즘·문학·재현 그리고 비평 ②세대별 아이돌과 재현 비평의 변곡점들 ③영화 속 타자에 대한 재현/재현 비평의 현재성 ④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비평

 

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간

길혜민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보임의 다른 표현인 ‘재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있을까. 재현은 시각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이외의 다양한 계기를 통해 대상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일본군‘위안부’는 영화 등 시각을 주된 통로로 삼아 관객에게 재현될 수 있지만, 소설의 문자적 표현을 통해서도 재현이 가능하다. 목소리를 통해서도 재현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며,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논문도 재현물 중에 하나다. 그런 점에서 재현은 무언가가 존재함을 알리는 방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고, 향기도 그림자도 없는 유령은 재현이 가능한 존재일까. 

 

《한 명》과 《종군위안부》

  김숨의 소설 《한 명》(2016)을 짧게 설명하자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단 1명 만이 남아있는 시간을 상상하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가상의 시간 속 서울, 재개발 대상 지역이 주된 공간이다. 주민 대부분이 떠난 재개발 지역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의 생존사실을 신고 및 등록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느 날, 단 1명의 마지막 위안부 피해자가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뉴스를 본 그녀는 지금 여기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재개발 지역 바깥으로 나가는 첫 시도를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몰이해와 실수로, 피해자들께 누가 되는 부분이 소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객관적인 진실, 사실에 근거”해 “소설가적 상상력을 자제하면서” 써내려간 이 작품은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을 한 줄, 한 마디씩 쌓아 만들어 낸 증언의 태피스트리다. 작가의 여러 겹에 걸친 자기 검열과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정확히 보이는 이 작품은 살아남은 자들의 언어이면서도 동시에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극악한 수용 생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언어를 다룬 조르조 아감벤(G.Agamben)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1998)은 증언이 어떤 아포리아(Aporia)를 안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무젤만’ ‘이슬람교도’ ‘고르곤’ 이들은 겨우 사람으로 식별할 수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무참한 경험 속에서 인간의 맨 밑바닥을 가리키는 존재들이다. “‘이슬람교도’는 삶과 죽음의 한계”인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가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문턱을 표시”하는 존재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슬람교도’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겨우 재현될 수 있다. 그것,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것을 본 사람은 ‘이슬람교도’들이며 인간인 동시에 비인간인 상황에 처했다는 조건은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이야기다. 그런 존재와 비존재의 동시성 속에서 ‘증언’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죽음을 포함하며 죽은 자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이끌어오며 때로는 심연을 길어내려는 고투가 함께 한다.

  김숨의 소설은 일본군‘위안부’의 증언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보임의 ‘불가능성’에 해당하는  ‘고르곤’의 얼굴을 재현하려고 했다. 20만 명의 여성이 일본군‘위안부’가 됐으며, “20만 명 중에 2만 명” 즉 ‘열 명 중 한 명’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조차 셈해지지 않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며, 김학순, 길원옥, 김복동, 이용수와 같이 자신의 생존을 알릴 수 없었던 존재가 있었다. 아직 우리와 관계 맺지 못한 존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들의 응시와 침묵에 대해 응답하려는 이와 같은 작업은 이전에도 시도된 적이 있었다. 

 《종군위안부》(1997)는 여성주의적 구술사 작업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샤먼인 아키코와 그녀의 딸 베카의 서사가 교차한다. 아키코가 일본군‘위안부’였던 시절 마주했던 위안부로 죽은 여성들의 말을 세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일종의 장례를 치러주고자 하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살아있는 자의 주변을 맴도는 유령과 같은 언어를 기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여성주의적 윤리에 입각해 생존자와 피해자인 위안부를 재현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해자-제국-남성의 시선이 아니기에 일본군‘위안부’를 다루는 탈식민주의적 민족주의가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서사라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비교적 다양한 담론이 비평에 등장하게 한다. 이 담론들의 경합의 장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연구와 운동이 만들어 낸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위안부’와 재현의 정치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놓이면서 발생한 사건들은 재현물이 가진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를 어린 소녀이자 순결함으로 표상한다며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손쉽게 화해의 모드로 전환하려는 어떤 이의 해석을 시작으로 ‘소녀상’의 이미지는 담론이 개입할 수 있는 시간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방해·협박·회유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여전히 있을 때,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가 만든 화해치유재단이 2018년 해산되기까지 생존자는 국경을 넘나들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은 1990년대에 시작한 책임감 있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 운동을 한 번에 역행하는 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필자는 그것이 ‘소녀상’이라는 재현물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사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억압받은 존재의 역사를 고민해왔던 발터 벤야민(W.Benjamin)에게 있어서 역사 이미지란 ‘지금 여기’,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다. 승자의 역사기술이 참고하지 않았음에도 지금과 관계하는 짓밟힌 이들이 알리는 ‘비상사태(예외상태)’가 ‘현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역사의 이미지다. 과거에 짓밟힌 자가 누구이며 지금 그 과거의 이미지를 스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으로 역사 이미지는 지금 여기의 수준을 알릴 수 있다. 논의의 수준, 공감의 수준, 표현의 수준, 담론의 수준 등을 말이다.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물이 제출될 때 공론장은 이미지와 함께 유동했음을 목도하며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재현이 역사 이미지로 존재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귀향>(2016)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모인 선의의 손길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 등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제작 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개봉한 이후 담론장 안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이 재현물 안에는 ‘지금 여기’와 과거가 혼합돼 있다. 여성주의적 구술사가 이룩한 성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의 증언과 여성의 고통을 가해자의 시선으로 재현하려는 포르노그라피적 관습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들이 겪은 고통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이 재현물이 유발할 수 있는 젠더연구에 대한 퇴행적 효과를 기각하기 위해 비평은 논쟁을 감내해야 했다. 국가가 지키지 못한 소녀들에 대한 가부장제의 연민이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남성성의 수준이 이해하는 일본군‘위안부’의 표상으로 돌아가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연구와 비평은 이미 그런 한계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이처럼 담론들과 서로 다른 시간대의 진리가 상충할 수 있기에 이미지는 멈춰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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