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희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원우비평]

너희가 바라는 나의 죽음을 보여줄게

박은희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이 글의 제목은 영화 <죄 많은 소녀>(2018)의 수화 대사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영희는 퇴원하고 돌아와 친구들 앞에서 수화로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수화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희가 자신들 때문에 말을 못 하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영화 후반부에서 이 수화의 뜻이 공개된다. “너희들이 내 죽음을 바라지 않았느냐. 너희가 바라는 내 죽음을 보여 주러 왔다.”

  영화 전반에서 영희는 자살한 친구 ‘경민’ 때문에 친구들, 담임, 형사, 경민의 엄마에게까지 죄 많은 소녀 취급을 받는다. “네가 뭐라고 했기에 경민이가 죽었니?” 이 물음은 ‘너는 죄인이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형사는 영희에게 “똑바로 앉아” 등의 폭언을 하고 친구들은 폭력으로 영희에게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한다. 그러나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경민을 은근히 따돌린 반 친구들, 딸에게 무책임했던 엄마, 담임한테까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감정을 전이시킬 대상으로 영희를 택한 것이다.

  영희가 죄인으로 몰려 죄책감을 뭉텅 뒤집어쓴 이유는 경민과 영희와 함께 있다가 토라져 돌아간 ‘한솔’의 증언에 힘이 실려서다.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영희는 담임과 형사에게 말한다. “경민이는 이미 죽으려고 했던 아이였어요. 내가 먼저 죽으려고 했는데 경민이가 선수를 친 거예요. 진짜 내가 먼저 죽으려고 했어요” 그때 담임은 영희를 때린다. “경민이한테 미안하지도 않냐”고. 영희에게는 같이 나서서 따져줄 사람이 없었다. 영희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려고 화장실에서 휘발유를 마신다. 이 때문에 영희는 식도와 내장이 다 녹아 말을 하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몸이 망가지자 이 죄라는 감정은 다시 친구들과 담임과 경민의 엄마에게 돌아간다.

  첫 부분에서 친구들에게 했던 수화의 뜻이 그즈음 다시 나온다. 그리고 이 죄라는 감정을 영희에게 뒤집어씌운 사람들 각자에게 다시 나눠주는 의식이 영희에 의해서 치러진다. 그들은 대항하지 않는다. 줬으니 받아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죄 혹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신이 중심이던 중세에도 있었고 기계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감정’이 있고, 이것은 감정이 사라진 듯한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계와 다른 부분은 사랑과 증오와 죄를 만들어 낼 무언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죄’란 때론 수만 명을 죽이고, 때론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며 언제나 우리 옆에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해 올리버 스톤(W.Stone) 감독을 포함한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절망과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10대를 통해 바라본 현대 사회의 단면을 포착한 강렬한 드라마”라고 말했다. 경민은 죽기 전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서 뭐해. 죽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절망적인 청춘에게 우리 예술가들은 뭐라고 답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고민해 봐야 할 질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한다. 예술가가 줄 수 있는 것은 ‘위안’이다. 그래도 버텨 보자는 의지. 미(美)로써 죽음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삶을 갈구하도록 위무하는, 같이 견뎌보자는 손짓. 그것이 젊은 예술가가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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