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정동'의 경험을 통한 윤리적 주체의 가능성

- 복수하기를 거부하는 주체 -


박소영 /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문화자본이 예술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을 대중예술로 보는 견해가 있다면, TV드라마는 그 대표 주자에 해당함과 동시에 가장 하찮고 저급한 형태의 것으로 인식돼 오곤 했다. 성별·연령별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누구나 시청 가능하거니와 복잡한 플롯이나 철학적 주제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을 따라가기만 해도 족한 저급한 매체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모든 TV드라마가 다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멍하게 시간 때우기 용으로 삼기에도 좋아 TV를 일컬어 바보상자라 부르는데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다.
  TV드라마의 판도에도 일종의 대격변이 일어났던 시기가 있었으니, 대략 2000년도가 그 기준이 아닐까 싶다. 2000년 이후 TV드라마에는 1990년대 중후반의 IMF 경제위기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여파를 경험하는 가운데 변화된 한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대중의 정서가 감지된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경제적·정치적·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사회구조적 분노가 상처받고 피폐해진 개인의 복수로 치환되는 양상들이 복수극과 막장극이 결합된 TV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신주진의 연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논문은 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2002)와 <아내의 유혹>(2008)을 비롯해 <마왕>(2007), <추적자>(2012),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 등 2000년 이후 최근까지의 복수극 다섯 편을 대상으로, 그 안에서 사회적 분노들이 개인적 복수의 방식으로 해소되는 순환적 전치의 과정이 발생함을 보여준다.
  이 작업을 위해 그는 레이몬드 윌리엄즈(R.Williams)의 ‘감정의 구조’라는 이론 틀을 원용한다. 이 용어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경험, 가치, 정서와 정동의 총체’로 요약될 수 있겠다. 신주진은 문화 형식들 간에 놓인 사회의 제반 요소들의 복잡한 결합을 이 용어를 통해 드러낸다.
특히 구조와 감정 혹은 정동이라는 양자의 결합에 복수극을 대입함으로써 ‘복수 정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그는 추출해 낸다. ‘복수 정동’은 복수극 안에서 복수의 주체와 복수의 대상 사이에서 움직이고, 일단의 인물들에게서 다른 인물들에게로 퍼져나가며, 그리고 복수극과 복수극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흐른다고 가정되는 일정한 정동의 흐름을 하나의 전체적 움직임으로 살펴보는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 두 드라마의 꾸준하고 열렬한 시청자였다. 소위 ‘본방 사수’는 물론이거니와 재방송도 여러 번 시청하는 충성심을 바치기도 했다. 두 편 모두 놀라운 흡입력과 시청률을 이끌어냈던 복수극 중에서도 막장의 대표들이다. TV드라마를 대중예술의 일부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도 유독 이 두 편에 대해서만큼은 선뜻 관대해지기 힘들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드라마들의 특정 장면들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불시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분노로 가슴이 벌렁거린다. 저주가 가득 찬 대사와 표독한 표정을 통해 표출되는 분노, 증오, 공포, 두려움 등의 온갖 ‘복수 정동’이 인물의 경험인지 나 자신의 경험인지 구분하기 애매할 정도로 내 신체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이 복수극들은 착한 주인공과 그의 안타고니스트로서의 악한 캐릭터들의 대립구도를 발동시키기에는 인물들이 저마다 악해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담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 의해, 서로에 대해 행하는 악행의 정도가 닮아 있거나 되풀이되고 있으며 때로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나 자신을 둘러싼 드라마 밖의 경험으로 확대되곤 했다. 다소 거칠게 표현됐으나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야말로 신주진이 설명하려는 복수 정동과 복수 정동의 이행구조의 구체적인 양상들이 아닐까 싶다.
  그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도달하려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복수 정동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감을 묻고 복수 정동의 경험을 통해 가능한 윤리적 주체의 제시가 아닌가 싶다. 그는 ‘타자에 의한 윤리적 주체 형성’이라는 주디스 버틀러(J.Butler)의 개념을 작동시킨다. 그리하여 윤리나 정의를 복수나 처벌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러한 시도는 오히려 사회적, 도덕적 폭력성의 일부로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복수와 처벌에 바탕을 둔 규범의 가치가 결코 윤리적일 수 없기에 그가 제시하는 주체는 ‘복수하기를 거부하는 주체’다.
  신주진의 논문은 ‘복수극’ ‘정동’ ‘감정구조’ 등의 이론 틀에 분석과 분석대상인 2000년대 이후 복수극 다섯 편에 대한 분석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뤄진 연구라 할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TV드라마가 갖는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있어 분석의 방대함과 이론적 정치함을 모두 확보하고 있다. 다만, 연구의 분량이 방대하다 보니 후반부에서 논문의 주제 의식을 충분히 제시할 여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복수 정동 드라마의 사회적 책임감’과 ‘복수하기를 거부하는 주체’에 대한 후속 연구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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