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경 / 다큐멘터리 감독

[지금-여기에서 재현을 비평한다는 것]

 ‘아직도 그 이야기야?’ 지금-여기에서 재현에 관해 비평할 때 피할 수 없는 볼멘소리다. 재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게 ‘도식적인 문제 제기’로, 재현에 대한 비평은 ‘도식적인 비평’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재현의 문제 제기에 있어서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지양해야겠지만, 현실의 맥락을 소거한 채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는 것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올바른’ 언표에 기댄 몰-맥락적인 근본주의가 아닐까. 다양한 매체-장르의 연구자들로부터 재현/재현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비평적 백래시와 페미니즘·문학·재현 그리고 비평 ②세대별 아이돌과 재현 비평의 변곡점들 ③영화 속 타자에 대한 재현/재현 비평의 현재성 ④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비평


무력한 피해자


장민경 / 다큐멘터리 감독

 

 참사의 재현은 뉴스 속보에서 시작한다. 참혹한 현장 이미지 사이사이, 병원에 실려 간 생존자의 모습과 유족-어머니의 울부짖는 얼굴이 나온다. 침몰, 화재, 붕괴 등 양태를 불문하고 초기 피해자 재현의 형식은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철저히 무력하고 아픈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구조 현장이다. 구조대원은 실종자를 찾고, 생존자는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남겨진 이들을 떠올리고, 유가족은 희생자를 안고 진실을 알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주변의 많은 카메라와 기자들은 피해자들의 심경을 파헤치고, 상처를 전시하고 구조상황은 왜곡한 채 관료들이 주는 정보만 받아쓰기 바쁘다. 고통도, 고통에 따른 반응도 제각기 다른 맥락과 형태를 띠지만, 무력한 피해자상에서 어긋난 얼굴은 모두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현장의 카메라들이 재현하는 ‘타인의 고통’은 그렇게 탄생한다.

 전파를 타고 들어온 타인의 고통은, 보는 이에게 연민과 책무감의 선택지를 던진다. 먼저, 보는 이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리고 자신의 무고함을 생각하며,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할 수 있다. 무력한 피해자를 재현한 힘은 그렇게 천사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 ‘무지한’ 천사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같은 지형 위에 있음(수전손택)’을 알지 못한 채 얼마되지 않아 ‘동정 피로’를 느끼며 관심을 거둔다. 반대로, 지형을 알게 된 이는 더 이상 천사로 남을 수가 없기에 자신의 책무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문제는 고통의 지형을 알게 된 이들 중에도 많은 경우, 그가 상정하는 ‘타인’, 즉 피해자는 여전히 무력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책무감을 느끼면서도 피해자들을 치료와 회복의 대상이라 여길 뿐 변화의 동반자라 여기지 못한다. 고통받는 타인은 무력하고 상실과 우울로 가득 차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대하는 이러한 인식론은 정부의 정책과도 조응한다. ‘사고-보상’ 프레임 속에서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심리상담을 포함한 의료지원을 피해 보상으로 내건다. 반면 진상규명은 상대적으로 부차화된다. 사회적인 원인은 개별적인 증상으로 치부되며, 치유의 사회적 과정을 차단한다. 그러나 실제 유족들의 고통은 기본적으로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온 것이고, 생존자들의 고통 또한 단지 개별적 증상뿐만 아니라, 희생자들과의 관계,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와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진단은 고통받는 타인의 인식-행동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타인이 겪는 고통: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피해자들이 전면적으로 나온 다큐멘터리들은,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바다에서 온 편지>(2015), <나쁜나라>(2015), <업사이드다운>(2016), <망각과 기억1>(2016), <망각과 기억2>(2017),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2018) 속 피해자는 무력한 이들이거나 치료의 대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인생에서, 외상의 경험을 통합하고, ‘남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다. 그리고 이 영화들 또한 서로가 앞서 던진 돌을 주워 다시 던지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시기에 따라, 이전에 나온 영화들이 하지 못한 이야기, 나오지 않은 내용과 형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한다.

 2015년의 경우 유족들의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그들의 바람을 알리고 연대를 요청하는 투쟁 영상의 경향이 강했다.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은 진상규명이고, 그것을 가로막는 ‘국가’와의 대치가 영화의 주요 갈등 구도였다. 다만 <나쁜나라>의 경우, ‘엄마 아빠의 마음’이라는 순수성을 강조하며, ‘나쁜나라’의 관료들과의 대치 후 어머니의 우는 얼굴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기존 온정주의가 반복된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분담이 분명하게 이뤄지는 등 영화는 전체적으로 ‘(정상)가족’의 연대 투쟁기로 서사화되는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외면하던 시기의 중요한 기록물로 남아있다. 바로 다음 해 나온 <업사이드다운>은 세월호 참사의 전체 타임라인을 따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되짚어 나간다. 유가족 아버지들은 자신의 직업, 생계의 고민과 함께 유족이자 한 개인으로서 경험한 참사-인지-행동의 과정을 털어놓는다. 다 같은 ‘유족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사정을 가진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전의 영화들과는 차이를 지닌다.

 이듬해부터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이하 미디어위)는 세월호참사 주기별 옴니버스 영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일종의 ‘동행’의 형식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각 주기에 따라 중요 이슈를 담거나, 드러나지 못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등 영화 제작 과정을 통해 함께 4.16운동을 해나갔기 때문이다. 가령 <망각과 기억1>에서는 인양, 청문회, 단원고 교실 존치 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았고, <망각과 기억2>에서는 이전까지 드러나지 못했던 피해자, 일반인 생존자, 잠수사, 희생 학생들의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기획했다. 그들은 ‘피해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통을 말하며, 관계적 치유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복잡한 마음속 낸 용기를 보인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4주기를 맞아 미디어위는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라는 마지막 옴니버스 영화를 내놓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참사의 고통은 마치 유족만의 것이고 그 책임도 유족만의 몫인 양 다뤄지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했다. 그렇게 생존자, 시민, 일상을 사는 유족, 목포신항에서 활동하는 유족들이 ‘공동의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모였다. 그 중 <어른이 되어>(2018)의 당시 단원고 생존학생 장애진과 <이름에게>(2018) 속 8인의 시민들은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 있는 지도 모를 그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외상은 참사 당일의 고통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잠잠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후 참사의 기억을 자신의 삶 속에서 통합해보려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강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는 줄 알았다가도 불쑥 솟아오른다. 생존 학생에게는 참사 당일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과 미안함으로부터, 특조위원에게는 조사와 청문회를 충분히 잘 끝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인천의 모 교사에게는 세월호 관련 전교조 활동으로 받은 징계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 각자의 증언은 참사 이후의 사회적 고통을 구성한다.

 특히 <어른이 되어>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감독 오지수가 동갑내기인 주인공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 내용은 위로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 안에서 망설이던 감독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방법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동행이었다.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너에게, 용기 내 다시 한번 사고 현장으로 배를 타고 간 너에게, 응급구조학과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너에게, 이렇게 함께 맛있는 밥을 야무지게 요리해 먹는 너에게, 함께 하고 싶다고. 넌 이미 가만히 있지 않았더라고, 아프고 힘들겠지만, 우리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맞길 꿈꾸며 나아가는 거라 생각하자고. 그리고 그런 세상을 기꺼이 함께하자고. 나도 그러겠다고. 꾹꾹 눌러놨던 그런 멋진 고백을 본인의 옥탑방에서 같이 맛있는 요리를 해 먹는 장면 위에, 오지수는 그렇게 힘차게 입혀놓는다.

 

길 위에서


 우리는 결국, 타인의 고통 앞에서 온전한 이해도 위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회복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으로 가능하니까. 아픔을 망각하는 사회가 아픔이 길이 되는 사회로 가려면, 그 길목에서 펼쳐지는 무수한 고민과 고민을 우리는 맞닥뜨릴 필요가 있다. ‘고민하는 피해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대’ ‘그들의 성찰과 행동으로 맺게 된 관계들’에 대한 재현이 더 많이 필요하다. 가령 5.18 유족들이 세월호 참사 유족들에게,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스텔라데이지호 유족들에게 갔을 때 번지는 그 힘. 그것이 손쉬운 연민과 타자화를 막고, 연대와 사회적 치유를 위한 안전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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