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진 / 문화연구자

 

[지금-여기에서 재현을 비평한다는 것]

  ‘아직도 그 이야기야?’ 지금-여기에서 재현에 관해 비평할 때 피할 수 없는 볼멘소리다. 재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게 ‘도식적인 문제 제기’로, 재현에 대한 비평은 ‘도식적인 비평’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재현의 문제 제기에 있어서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지양해야겠지만, 현실의 맥락을 소거한 채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는 것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올바른’ 언표에 기댄 몰-맥락적인 근본주의가 아닐까. 다양한 매체-장르의 연구자들로부터 재현/재현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비평적 백래시와 페미니즘·문학·재현 그리고 비평 ②세대별 아이돌과 재현 비평의 변곡점들 ③영화 속 타자에 대한 재현/재현 비평의 현재성 ④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비평


‘민주화 이후의 페미니즘’과 비평적 가능성

오혜진 / 문화연구자

  정치학자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테제를 통해 민주화 이후 물화된 방식으로만 상상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의 페미니즘’이라는 명제를 통해 ‘민주화’와 ‘페미니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모순과 폐색을 드러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테제를 통해 지시하고 싶은 현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87년 체제의 성립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그리고 2016년 겨울에 새롭게 일군 ‘민주주의’가 여성의 현실에 도래하는 일은 매우 요원했다는 점이다. 두 번의 광장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손쉽게 지워지거나 부차화됐으며, 최근 각계에서 전개된 #MeToo 흐름에서 보듯 두 번의 민주화 모멘트 이후에도 여성 인권의 불안정한 지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두 번의 민주화 이후 페미니즘이 상상되는 방식이다. 특히 2016년 광장에서 페미니즘이 운위된 방식은 현재 페미니즘에 대한 탈정치화된 이해방식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의 광장 참여는 여성 혐오 발언 규제 및 성희롱·성추행 사례 고발과 같은 규율화의 목적만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됐고, “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구호 또한 민주주의의 성별에 대한 근본적인 심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장의 페미니스트들은 부적절한 풍기를 단속하러 나온 경찰 혹은 자경단쯤으로 취급됐다. 한국사회의 총체적 난국에 대한 전면적 변혁을 요구했던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기획(나영, 「광장의 페미니스트, ‘함께’와 ‘우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11월》(2017))이 너무나 손쉽게 ‘정치적 올바름’ 혹은 ‘치안’에 대한 요구로 간주된 이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기억해둬야 한다. (오혜진, 「광장과 ‘혁명의 매뉴얼’」, <한겨레>, 2016. 11. 21.)

  최근 #MeToo 등을 거치며 나타난 강력한 백래시(Backlash) 중 하나는 페미니즘을 폭력과 범죄를 고발·예방하는 데 동원되는 일종의 ‘도덕’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강제적 이성애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계의 기율을 질문·변혁하려는 비평적 시각이자 급진적 정치학이 아니라, 그저 자유주의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매너나 에티켓, 또는 부적절한 언행이나 문화재현물을 삭제·필터링하는 검열장치로만 간주하려는 일련의 담론은 페미니즘을 탈정치화하려는 반동적 흐름에 조응한다.

벌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최근 일부 비평가들에게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범주는 이 분류에 속하는 작품들의 가치를 모조리 ‘후려치는’ 게토화(Ghettoize) 전략으로 운용된다. 이들에게 페미니즘/퀴어 소설은 ‘정치적 올바름’에 구속된 것이며,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노정한 것이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은 별다른 근거 없이 ‘문학적인 것’ ‘진보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대립하는 것으로 배치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정치적 올바름’이 흑인민권운동이 내세운 진보적 가치들을 백인 기득권층으로부터 강탈당한 데 대한 냉소와 좌절의 용어였던 1970년대 미국의 상황과, 그것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이자 민주주의의 한 척도로서 지향됐던 1990년대 문민정부 이후 한국의 상황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맥락적·초역사적이다. 무엇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정치적 자원이었던 역사와 사회적 조건을 간과한다. (오혜진,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21세기문학> 81, 2018년 여름)

  그런데 민주화 이후 페미니즘을 생각할 때 직면하는 더 큰 곤경은 따로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들. #문단내성폭력 운동을 통해 다수의 시인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되자, 한 시인은 문지 시인선의 4백번 대 시집들 중 성폭력 가해자의 시집을 철회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최영미 시인에 의해 고은 시인의 오랜 성추행 관습이 고발되자 혹자들은 문학 교과서에서 고은의 시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온라인에서는 한 영화 관련 기관이 선정한 여배우 특집 상영작 중 성추행 가해자로 고발된 감독의 작품이 있으므로, 해당 작품의 상영을 취소하고 해당 기관의 사과를 촉구해야 한다는 서명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삭제·취소·철회로 점철되는 이 일련의 과정에 페미니즘 비평은 어떻게 개입 (안)하고 있을까.
언젠가 이 사라진 작품들을 볼 수 있을까. 그것들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불경한 일인가. 죄를 지은 것은 그인데 ‘무지에의 강요’라는 형벌을 치르는 것은 왜 우리인가.

 

 

페미니즘 정치학의 비평적 가능성


  지난 #○○계_내_성폭력 운동에 대처하는 문화예술계의 가장 손쉬운 방식은 해당 창작자의 작품을 시장과 플랫폼에서 전면 삭제·취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에서 문화예술 감상이란 일종의 시간 싸움이다. 한국에서 문제가 된 창작자를 처벌하는 가장 자명한 방식은 바로 그 창작자의 창작물을 삭제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더 많은 문화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애호가들은 눈앞의 창작물의 창작자가 아직 ‘가해자’로 고발되지 않았을 때, 마치 크로키를 그리듯 빠르게 그것들을 음미해 문화적 기억으로 축적해둬야 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창작자와 창작물은 분리해 인식해야 한다는 식의 미적 근본주의나, 사실상 가해자 옹호 논리로 오용되는 미학적 자율성 개념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들이 연루된 작품을 삭제하는 행위가 곧 대중에 의해 자행되는 파시즘과 같다는 식의 비약을 감행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제적인 인간과 연루된 창작품을 눈앞에서 없애는 것만이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젠더전쟁에서 페미니즘 비평이 개입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해자가 연루된 작품들을 문화 제도와 시장에서 삭제·철회함으로써 해당 작품의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소멸시키는 것은 분명 정치적 운동의 한 효과일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작품이 삭제된 채 그 자리가 공백 혹은 해당 작품이 없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봉합된 자리로 남는다면, 그 이전 시대와는 ‘미적인 것’에 대해 완전히 달리 평가하게 된 페미니스트 대중의 지적 운동의 역사와 궤적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을까.
혹자는 한국문학 전체를 ‘한남문학’으로 매도하며 여성작가들의 작품들로만 구성된 ‘페미니즘 문학사’를 기획한다. 하지만 작가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이 곧 그가 페미니스트임을 보증하는 증거일리 없거니와, 그런 인식론이야말로 한국문학을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승인하는 효과를 산출한다. 한국문학의 문학성을 결정하는 지배적 기율이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것과, 한국문학이 남성들만 독점해온 지적 유산이라는 생각은 구분돼야 한다. 후자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문학(사)의 보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성 중심적 기율로 구성된 한국문학(사)의 내·외부에 균열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지적 운동, 그 맥락과 조건을 보전하고 상상하는 일이다. 물론 문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삭제와 철회, 남성작가의 작품에서 여성 혐오적 장면 적발하기, 성별 분리주의에 입각한 문학사 새로 쓰기 등의 시도가 페미니스트 비평 방법론으로써 선험적으로 기각돼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더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것은, 기존에 ‘문학성’의 정수라고 여겨진 작품들의 문학 전략, 남성만이 지성과 창조성의 주체임을 증명하는 데 동원된 작품들이 기실 얼마나 허구적인 믿음에 의해 구성된 신화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우리의 지적 자원을 앙상하게 하는 ‘뺄셈’의 정치학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새 세대가 기획하는 민주주의의 상을 입체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지적 실험이 될 때 우리는 ‘민주화 이후 페미니즘’의 정치적 가능성을 목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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