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향 / 영화평론가

[실화와 영화] ④ 역사를 바꾼 평범한 영웅들

  근래 들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는 한국 영화들은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보다는 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갔던 다소 평범한 인물들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갈등과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는 왜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일까. 이번 차례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이름 없는 자’들을 영화화한다는 것
- 최근의 실화 소재 영화들에 부쳐


이수향 / 영화평론가

  영화라는 매체의 흐름과 변화는 장르적인 컨벤션의 유지·변주라는 측면과 영화가 만들어지는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이라는 측면 두 가지 사이에서 길항한다. 전자가 매체의 형식적인 레퍼런스들이 작용하는 부분이라면, 후자는 변화무쌍한 정치·사회적 측면들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의미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은 다분히 후자와 관련이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은 ‘지금 이곳’과 영화화된 사건 간의 시간적 거리에 따라 ‘역사극’과 실화(기반) 영화로 분기된다. 그러므로 실화 영화는 비교적 근거리의 과거에 일어난 실존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문제영화'의 범람


  2000년대 중반까지 조폭영화가 강세를 보이던 한국영화계는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사회문제영화(Social Problem Film)’가 대폭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실화 기반 영화가 많이 제작됐는데, <도가니>(2011), <26년>(2012), <변호인>(2013), <다이빙벨>(2014), <밀정>(2016) 등의 작품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정권교체기인 2017년도에도 이어져 <재심>, <박열>, <택시운전사>, <1987> 등이 개봉되기도 했다.

  사회문제영화의 핵심은 그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관련된 실제의 사건을 얼마만큼의 깊이와 밀도로 보여줄 수 있느냐에 있다. 이는 실화 기반 영화가 당대의 정치적 맥락의 비의성(秘意性)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즉 현실의 상황이 다소 고착화되거나 전망부재의 상황으로 느껴질수록 혹은 중요한 정치적 동력이 필요할수록 영화를 통해 현재 시대를 역사적 맥락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보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화보기의 쾌감적 측면에서는 단순한 오락물이 줄 수 없는 다소 지적인 유희의 만족감을 주며, 이미 그 사건의 결과를 알고 있다는 측면에서 명료한 완결에 대한 안정감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름 없는 자들’의 복원


  이러한 경향은 그간 각 학문 영역의 1·2세대 학자들이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대문자 역사(History)를 써내려가던 작업이 일단락되면서, 구심점들을 뼈대로 세워 선조적으로 논의하는 가운데 소거됐던 하위 주체(Subaltern) 혹은 ‘이름 없는 자’들의 몫을 다시 숙고하기 시작한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계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를 다룬 <동주>(2016), <덕혜옹주>(2016) <박열>(2017) 등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체화한 인물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이들은 역사적 상황의 의사결정권자로 기록된 인물들은 아니지만, 개연성과 핍진성이 가미된 영화적 표현 방식은 익히 알려진 이들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는 현존을 눈앞에 재현해 낸다. 그리고 연대기적 역사 서술의 명료한 객관성 아래 잠복해 있는 무수한 ‘개인’들의 삶이 때로는 더 원초적인 역사적 경험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비교적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 중에서는 <위로공단>(2015)의 성취가 눈에 띈다. 이 영화는 70년대 빛나는 산업화의 상징인 수출탑 뒤에 지워진 ‘여공’들의 존재를 다시 복원해낸다. 여성이자 노동자로서 그들이 겪어온 고난과 투쟁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사에서 잊혀졌던 소영웅들을 새로이 명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택시운전사>에서도 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되는 사건의 진상이 한 택시 운전기사의 휴머니즘에 기반한 용기 있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간 역사적 기록 아래 묻혀 있어 정황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됐던 ‘이름 없는 자’들을 복원하는 작업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서사적 구현의 능력과 역사적 공감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영화 <택시운전사> [출처: 다음 영화]
  ■ 영화 <택시운전사> [출처: 다음 영화]

 

‘전역사(Pre-history)’의 복기를 통한 주체적 삶의 추구


  사회문제영화들은 장르적 성격상 특정 주제에 관여되며, 교훈성을 관객에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 당대의 문제적인 지점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관객의 지적 고양과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이나 인물을 취사선택하는 과정부터 영화적으로 그려내는 과정까지 완전한 ‘팩트’가 아니라 창작자의 가치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특히 역사적 평가가 완료되지 않은 근현대사의 사건이나 인물을 다룬 경우에는 종종 논쟁적인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또한 영화를 통해 더 큰 사회적 이슈가 생산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적인 격전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이 영화들은 공과(功過)의 판단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인물과 사건들을 불러오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 대중적인 소구력을 보여준 영화들이다. 시대적 배경을 가능한 한 실제와 비슷하게 불러내 시각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다루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감정적으로 동조하도록 사건을 배치한다. 핵심은 중심인물을 ‘보통 사람’ 혹은 ‘평범한 사람’으로 설정해서 일반 대중의 공감력을 높인다는 점이다. 촬영이나 내러티브 모두에서 현실 세계와의 접점 혹은 관객들과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공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택시운전사>처럼 당시 실제 촬영된 다큐멘터리 필름을 사용하기도 하고, <1987>처럼 실제 인물의 죽음을 찍은 사진을 그대로 영화적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이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초점 화자가 끊임없이 자신이 묘사하는 세계가 진실임을 믿어달라고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미진한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관객들에게 과제로 남겨둔 채 끝이 난다.

  실화 기반 영화들이 던지는 문제의식과 과제가 대중적으로 호응 받고 있다는 것은 결국 현재 삶의 기저를 이루는 인식론적 체계와 사회적 시스템들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 전역사(Pre-history)로 돌아가 이미 지나쳐 온 역사적 분기점들이 주는 교훈을 기억해내기도 하고 반대로 여전히 꼬여있는 현재적 문제의 실마리들을 찾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으로 정리된 위압적인 역사나 영웅담이 아니라―이제 위인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히어로들이 대신하므로―한 사람의 주체성들이 발현돼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게 된 사건들을 복기하려는 노력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의 주체성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어떠해야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 삶의 영속성의 측면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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