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 초등성평등연구회 연구위원

 [페미니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④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

  대한민국은 여성 혐오와 전쟁 중이다. 오래 쌓여 견고해진 가부장적 여성 혐오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여성 혐오가 가세했다. 여전히 여성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식 노동자를 꿈꾸는 대학원생으로서, 인권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한민국 페미니즘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페미니즘 교육은 왜 필요한가

김영선 / 초등성평등연구회 연구위원

  지난 1월 6일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초·중·고등학교의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촉구하는 청원이 게시됐다. 불과 한 달 만에 21만 3219명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해 청와대에서는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답변의 골자는 페미니즘 교육을 포함해 성평등을 통합한 인권교육을 위해 다방면으로 조사하고 방안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교 현장에 있는 필자는 관련된 그 어떤 변화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와, 청원에 동의한 21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페미니즘 교육은 꽤 시급하게 처리돼야 할 문제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간 변화를 느끼게 하는 작은 무언가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성평등 교육을 포함한 인권교육에 대해 국가와 교육부처에서 얼마나 안일하게 여겨 왔는지를 역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은 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논하며 그것을 의무화하자고 목소리를 냈던 것일까.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남성 중심적인 보편성과 표준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착취와 억압을 해소하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이라는 단어의 제시 때문인지 페미니즘은 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남성에 반하는 오로지 여성만을 위한 사상으로 왜곡돼 이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한다. 그 어떤 인간도 ‘성(性)’으로 인해서 차별받을 이유가 없음에도 공공연히 행해지는 차별과 그로 인한 억압과 착취를 없애자는 흐름이, 다른 성을 가진 이들을 공격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은 큰 틀에서 보면 인권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의 ‘성’과 상관없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소중하며, ‘성’으로 인해 차별하거나 차별당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이다.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초등학교에 만연한 성차별

  필자를 포함한 주변 다수의 교사들이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이 ‘나’답게 지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였다. 여성 혐오 발언 및 여성 혐오 행동이 생활화와 사회화를 통해 성차별적 인식으로 무의식속에 자리 잡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만의 정립된 가치관으로 사회현상을 파악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학교라는 사회 공간에서 선생님과 급우들과 함께 배우며,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사회를 보는 관점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그런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혐오로 둘러싸인 사회와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올바른 판단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혐오를 하는 자와 혐오를 당하는 자가 돼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차별적인 성관념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 예로,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언어를 사용한 혐오 표현이 있다. 아이들은 ‘말’이 가진 강력함과 무서움을 신기할 정도로 몰라 당혹감을 줄 때가 많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유행어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그 말들 중에는 여성 혐오 표현이 상당히 많이 포함돼 있다. 남자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복도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에게 온라인에서 시작된 ‘보이루’라는, 여성 성기를 비하하고 조롱하며 만든 말을 쓴다. 친구들과 사소한 약속을 하며 ‘느금마’ ‘앰창’이라는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여성 혐오의 말뿐이 아니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들어온 고정된 성역할 관념으로 인해 ‘나’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남자아이들은 대개 남자답고, 울면 안 되고, 운동을 잘 해야 하며, 조용히 책을 읽기보다 뛰어노는 것이 당연하고, 분홍색이나 노란색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검열한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남자아이들의 검열 항목에 외모 검열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여성이므로 조신해야 하고, 잘 못 하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도와줘야 하고,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축구를 하면 안 되고, 공기놀이나 책 읽기 또는 그림 그리기를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파란색, 검은색을 선택하기보다 분홍색을 선택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고정관념도 만연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아이돌 가수들을 보며 그들의 몸무게, 얼굴, 화장법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이 코르셋이 돼 스스로를 억압하고 검열한다. 앞머리가 갈라지지는 않았는지, 입술에 각질이 보이지 않는지, 얼굴에 여드름이나 잡티가 없는지, 몸무게의 앞자리가 4를 넘지는 않는지 말이다.

  결국 심각한 자기 검열로 인해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자신을 보지 못하며 살게 된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남자니까, 여자니까 이래야 한다’고 학습된 것들로 인해 꾸준히 스스로를 검열한다.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아직 자아가 약한 아이들은 자존감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한순간에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페미니즘 교육은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

  이런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변화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성인이 돼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가정해보면 그 사회가 얼마나 불행한 사회가 될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별에 따라 차별과 억압을 받고 스스로를 옭아매게 하는 사회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어찌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며, 다른 수식어 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으며 한국이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특히 성차별적 혐오의 주된 대상인 여성이 어떤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성별로 인한 차별이 합리적이지 못함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준과 정의에 대해 반문한다. 남성성이 여성성보다 우월하다는 기준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존의 규범에 대해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여성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별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교육 역시 이러한 기준과 정의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을 시작점으로 해 교육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페미니즘 교육을 시행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과제는 교육 자료의 변화와 함께 페미니즘 교육이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대표적인 교육 자료는 교과서다. 교육 현장에서 교과서는 다른 교육 자료보다도 대다수 학교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가 지닌 역할의 무게에 비해 그 내용은 성차별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다. 엄마로 대변되는 성인 여성은 분홍색 레이스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고, 아빠로 대변되는 성인 남성은 양복을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의사 가운을 입고 진료를 하는 삽화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이 매일 마주하게 되는 교과서를 통해 무의식중에 성차별적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교육 자료에 숨어있는 이런 성차별적인 것들을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페미니즘 교육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이 교육 현장에서 정착되고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교육 구성원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현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도 성차별적인 표준화된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성별로 구분돼 차이가 나는 것들을 바라볼 때 ‘왜?’라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당연시했던 성차별적 규범들에 예민해지고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과 사회에서 사람들과 마주하고 생활하며 배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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