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교수칼럼]

설득은 폭력이다

이유미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설득은 폭력이다’ 너무나 선정적인 제목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은 의사소통이라는 분야를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 결론의 물음은 ‘우리가 왜 설득을 중요시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매번 왜 설득에 실패하는가.’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물음. ‘나는 나를 설득할 수 있는가.’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음에 대한 강연을 보고 우연히 댓글을 확인하게 됐다. 그 댓글에는 “우리는 원숭이가 아니잖아요!” “왜 혼자가 편하다고 외치는지 아는가? 소통! 소통! 입만 열면 하는 소리이지만, 결국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다.” “홀로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 아닌가요?” 등 부정적인 내용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댓글은 사실상 나의 예상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 번 더 깨우쳤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소통’이란 단어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 청중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왜 소통이 이렇게 문제일까. ‘소통’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뜻이 서로 통해 오해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뜻이 서로 통했다’는 것은 화자의 말을 문자적으로 알아듣는 것이라면, 오해가 없다는 것은 그 의도까지 온전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배고프지 않니?”라는 친구의 말이 ‘밥을 같이 먹자’는 것인지 ‘밥을 사달라’는 말인지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의도를 이해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대로 밥을 같이 먹거나 반드시 사줘야만 할까. 이처럼 ‘소통’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화자와 청자라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욕구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발현됐을 때 이를 조율할 수 있어야 소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강연을 대하는 청중의 댓글에서 단지 설득당하지 않았다는 점만이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청중의 반응은 결국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욕구와 이것이 어려워 피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가 충돌하고 있음에 대한 반응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충돌은 협상의 필요성을 낳고, 협상을 통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소통은 ‘협상’이고, 반면 일방적인 설득은 ‘폭력’이다. 타인의 욕구를 인정하는 자세, 그리고 나의 욕구도 인정하는 자세, 이 모두를 인지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려는 노력, 이러한 자세가 결국 진정한 설득과 협상을 통해 소통을 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의 욕구만을 위해 타인을 설득하려는 노력 대신 이제는 타인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협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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