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6.4 월 12:21
기획사회
[사회] ‘한국식’ 자본주의의 기업가적 기원김명수/ 계명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조현준 편집위원  |  dision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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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승인 2018.04.03  17: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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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_기업국가 한국과 대안의 상상] ②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일본의 자이바쯔(財閥, Zaibatsu)나 미국의 초거대기업(major company)들과는 다르게, 한국의 재벌은 입법과 사법 제도를 초월하는 정치집단이기도 하다. 이 말은 법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초월해, 기업국가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바로 한국의 재벌 시스템, 혹은 ‘한국식 자본주의’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국이 기업국가로 변화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기업을 위한 국가, 한국 ②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③ 사회민주주의와 한국의 미래 ④ 문학적 상상력, 비판정신과 연대정신


‘한국식’ 자본주의의 기업가적 기원


김명수/ 계명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최근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개혁과 한국사회 전반에 대한 재검토다. 그동안 정치권과 국민들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고, 그 기저에 은폐된 기업국가 한국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국정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에게 굴지의 대기업들이 뒷돈을 댔고, 기업가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았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국정농단의 공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영어(囹圄)의 몸이 됐고, 전직 대통령 둘을 구속시키는 안타까운 역사가 남게 됐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비리와 관련해, 그동안 정당화됐던 한국 재벌들의 지배구조와 한국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새삼 의심받게 됐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 한국 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전제 하에 늘 예외였다. 소위 산업화시대 그들 재벌들은, 때론 국제무대에서 국민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대표선수이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와 정당하게 향유했어야 할 분배 몫을 희생시켜 이뤄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탄생, 그리고 한상룡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많은 학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서 찾는다. 어떤 이들은 조선후기의 자본주의적 맹아와 대한제국기의 자주적 근대화개혁에 주목하고 한국 부르주아지의 원형으로 대한제국기 상인층의 성장을 강조했다. 또 다른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 과정 속에서 이뤄진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을 근거로 ‘한국식’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일제강점기에서 찾는다. 이 글에서는 한상룡(韓相龍, 1880-1947)이란 인물을 대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고민하는 후배 동학들에게 한국 기업가의 선구적 사례로 제공하고자 한다.

  한상룡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라고 불렸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그렇게 불렸다. 시부사와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며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을 토대로 5백여 개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고, 기업가들을 아우르는 상업회의소 등 각종 경제단체를 조직했으며, 재계 은퇴 후에는 사회공익적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시부사와는 한국에 있어서는 금융, 철도, 전기, 광산, 농업 등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식민지 경제침략의 첨병’이었다. 한상룡은 그런 시부사와에 비견됐고, 직접 시부사와를 롤모델로 삼았다. 한상룡 등 유력 조선인 17명과 일본인 27명이 함께 1933년 12월에 장충단공원에 시부사와의 송덕비를 건립한 것도 그런 인연에서 기인한다.

  관존민비 사상이 팽배하고 친인척이 대한제국 정부에 두루 포진돼 있던 시기, 천시 받던 실업계에 한상룡이 투신한 것은 1903년의 일로, 고종황제의 종형제인 완순군 이재완에게 발탁돼 공립 한성은행에 우총무로 참여하면서였다. 한성은행은 현존 최고(最古)의 은행으로 1897년 대한제국의 고위관료와 상인들이 총세무사 브라운의 특강을 듣고 합자해 설립한 은행이다. 하지만 1903년에는 운영자금을 일본 다이이치은행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한상룡 또한 은행의 경영방법이나 기장법을 다이이치은행에 출입하면서 배웠다. 이후 한상룡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상태로 전락한 1905년 이후로 한성수형조합 평의원, 한성농공은행 설립위원, 동양척식회사 설립위원, 한국은행 설립위원에 임명되면서 특히 금융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침략에 협조했다.

  이후 한상룡은 1921년까지 한성은행을 자본금 6백만 원의 은행으로 성장시켰다. 그 사이 그는 일제와 조선인들 사이에 형성된 지배와 피지배의 긴장을 적절히 이용했다. 1911년 1월 ‘조선귀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은사공채를 활용해 한성은행 증자에 성공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총독부나 내지인(=일본인)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조선인으로부터 국적(國賊)이라고 욕을 듣고, 조선인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총독부나 내지인으로부터 독한 놈이라고 비난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냥 조용히 시국의 추세를 관망할 뿐입니다”라고 답한 것은 식민지 기업가로서 그의 입장을 솔직히 표현한 것이다.

   
▶ 조선총독부와 광화문통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국가 권력과 자본의 공생, 조선실업구락부

  한때 사사키 유노스케(佐佐木勇之助) 제일은행 두취(=은행장)나 단 다쿠마(團琢磨) 미쓰이합명회사 이사장 등 일본 조야의 명사를 스스럼없이 방문해 의견을 교환하던 조선 최고의 기업가 한상룡은 1928년을 기점으로 조선재계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1932년 자본금 1천만 원의 조선신탁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조선재계에 복귀하고자 했으나 이마저 은행업자와 기설 신탁업자들의 반대에 직면해 좌절하고 말았다. 이후 한상룡은 ‘정치가 타입의 기업가’로 일제의 조선통치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조선재계의 실력자로서의 명맥을 유지해갔다. 전시기에 들어서 한상룡은, 조선재계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일본군의 대륙침략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동시에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성을 갖는 조선경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조선재계의 코디네이터로서 역할을 자임했던 ‘조선의 시부사와’ 한상룡의 활약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한편, 한상룡은 1920년 3월에 조선인실업가를 중심으로 ‘조선실업구락부’라는 재계단체를 조직해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회장으로 있었다. 비록 조선실업구락부의 조직이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를 배경으로 한 친일세력육성정책의 결과라고는 하나, 그 이전부터 조선인실업가들이 주도한 경제단체의 조직 요구가 있었음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실업구락부의 멤버 구성은 1935년을 기점으로 변화를 보이는데 일본인 회원의 수가 조선인의 그것을 상회하게 된다. 1930년대에 본격화한 일본의 대륙경영과 조선공업화를 반영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조선실업구락부는 총독부 관료, 재조일본인실업가, 조선인실업가 상층부의 사교클럽으로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조선경제에 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경제보다 정치가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식민지 국가권력으로서 조선총독부와의 네트워크 및 공생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인 기업가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한말 상인 출신인 조진태, 백완혁, 박승직, 김한규 등과 함께 뒷날 일제강점기 조선경제의 유력 기업가로 성장하는 김연수, 박흥식, 민대식 등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해방 후 한국경제를 리드했던 백낙승, 윤호병, 구용서 같은 이들도 역시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경제를 대상으로 조선재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실업구락부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해방 후의 한국경제’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담당자들을 길러낸 ‘산실(産室)’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정치와 경제의 유착 관계를 학습한 조선인 기업가들이 해방 후 한국경제의 주요 기업가가 된 것이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기업가적 기원을 짐작하게 한다.

이른바 ‘한국식’ 자본주의라는 것

  해방 이후 한국의 기업들은 늘 근대화의 기수로서 자기 역할을 요구받았고, 그러한 ‘국책(國策)’과 기업 스스로의 ‘사익’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기업의 이윤추구를 전제로 하면서도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다. 번듯한 기업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기업이 무엇을 하든 한국의 프론티어였고,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던 시기였다. 알렉산더 거센크론(A. Gerschenkron)이 이야기하는 경제적 후진성, 급속한 산업화, 무자비한 독재권력의 사용이 혼재했던 시기였다. 1970년대에는 선진국 캐치업(Catch-up)과 수입대체가 지상과제였고, 80년대부터는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됐다. 1980년대 후반처럼 3저 현상과 같은 국제적 경제 환경이 호기로 작용한 경우도 있었지만, 1997년의 IMF 외환위기 사태는 한국 경제에 지금까지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현재 한국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은 이렇듯 지난한 과정과 영욕의 세월을 거쳐 축적된 결과다. 그 과정에서 전술했듯이 재벌 기업들의 ‘예외’가 있었고,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이른바 왜곡된 지대추구행위를 내용으로 하는 ‘한국식’ 자본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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