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 문예창작학과 교수

 [교수칼럼]

해외동포가 쓰고 있는 문학작품

이승하 / 문예창작학과 교수

  대학원생의 목표가 세계화의 척후병(斥候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류는 한글 교육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한글을 배우려는 외국인에게 원어민 교육을 하는 대학원생이 늘고 있는데 이제는 우리 문화를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민의 역사도 곁들여서.

  외교통상부에서 발행한 ≪외교백서≫를 보니 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민의 수가 7백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좁디좁은 한국을 떠나 육대주에 나가 살고 있는 교민의 수가 이렇게 많다니 한국민의 저력이 놀랍다.

  왕조 말기와 구한말부터 만주와 연해주로의 이주가 시작됐다. 기근을 못 견뎌, 탐관오리의 학정을 못 이겨, 죄를 짓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해로 가서 광복을 꿈꿨다. 강점기 말기에는 일본으로 간 조선인의 수가 2백만에 육박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노동자 28만이 포함돼 있었지만.

  스탈린(J.Stalin)이 1937년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에 살고 있는 조선인 20만을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켰으니 그 유명한 ‘고려인 강제이주’다. 일본의 러시아 극동지역 침략전략을 간파하고는 이 지역 조선인이 화근이 될지 모른다고 90회 이상 수송 열차에 실어 이주케 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우리 민족이 살게 됐다. 한국전쟁 이후로는 미국으로, 베트남전쟁 이후로는 호주로 우리 교민이 대거 이주해 삶의 터전을 이뤘다.

  미주문인협회의 초청으로 2006년과 2007년에, 미주시문학회의 초청으로 2009년에 미국 LA에 가서 특강한 후에 현지의 교민 문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호주 시드니에서 발행하는 <한호일보>의 초청으로 가서 특강을 일곱 번 하고 왔다. 신문사 주관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시상식장에서 할아버지가 아들과는 한국어로, 손자와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비애를 느꼈다.

  연구자로서 다년간 해외동포들이 쓴 문학작품을 보고 있는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교포 1세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창작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눈물을 글썽이며 달을 본다. 또 하나는 현지어 습득 과정에서 세대 간의 갈등이 불거진다는 것이다. 성인이 돼 이민을 간 1세대는 현지어 습득이 쉽지 않다.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온 1.5세대는 학교에 다니면서 빨리 현지에 적응한다.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는 부모나 조부모의 노력이 없다면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말은 해도 글은 쓸 줄 모른다.

  교민들은 모국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애국심에 충만해, 향수를 담아 쓴 작품을 본국에서는 외면해 왔다. 나는 ‘그들만의 리그’를 이룬 교민의 작품을 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준 향상을 위해 조언도 해줬다. 이들의 모국어 사랑이 눈물겨웠다. 한글을 널리 알려 한국을 찾게 하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얘기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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