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9.5 수 00:42
특집
[페미니즘] 여성 혐오의 언어, 여성 대항의 언어유민석 /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 수료
정유진 편집위원  |  _hege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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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호]
승인 2018.03.06  17: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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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_‘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대한민국은 여성 혐오와 전쟁 중이다. 오래 쌓여 견고해진 가부장적 여성 혐오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여성 혐오가 가세했다. 여전히 여성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식 노동자를 꿈꾸는 대학원생으로서, 인권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한민국 페미니즘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언어와 페미니즘 ②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위인들 ③ 여성 몸의 해방과 주체성 회복 ④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


여성 혐오의 언어, 여성 대항의 언어

유민석 /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 수료


  김치녀, 된장녀, 여교사, 여의사 등 여성들은 언어를 통해 규정당하고 비하당하기도 하지만, 또한 거기에 맞설 언어가 부재함을 느끼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언어철학자 린 티렐(L.Tirell)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적인 범주가 우리의 사회적인 범주를 반영하기 때문에, 언어는 곧 정치적인 투쟁의 무대이다. 또한, 언어는 성차별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는 억압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런 세계를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저항의 도구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억압적인 언어인 ‘혐오표현’과, 그에 맞서는 해방의 언어인 ‘대항표현’을 다뤄보고자 한다.
 

혐오표현: 여성들은 침묵 당한다


  고참은 후임병에게 “가서 화장실 청소 좀 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후임병은 고참에게 “가서 화장실 청소 좀 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언어는 권력 관계에 따라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로 나뉜다. 페미니스트 이론가 캐서린 매키넌(C.Mackinnon)에 따르면, “남성의 표현의 자유는 여성의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킨다.” 페미니스트 분석철학자 레이 랭턴(R.Langton) 역시 매키넌의 논의를 이어받아, 남성들의 억압적인 말인 혐오발언은 여성들을 침묵시키며, 여성들은 언어적인 권력을 박탈당한 채 침묵당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혐오발언 행위의 주요 효과는 개인적인 피해자나 피해자 집단 측의 잠재적인 대응을 침묵시키는 것, 즉 ‘발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랭턴은 “만일 당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당신은 때로 권력이 없는 자들의 발언을 침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고 했다.

  혐오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침묵시키는 언어행위라면, 역으로 권력이 부재한 소수자들, 즉 여성이나 동성애자는 침묵 당하는 존재다. 랭턴에 따르면 “어떤 언어 행위들은 어떤 맥락에서 여성에게 발언 불가능한 것이다. 즉 비록 적절한 말들이 발언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발언들은 그것들이 의도했던 행동들로 간주되지 못한다”며 포르노그래피 속에서 여성들의 거절인 “노”가 “예스”로 둔갑되는 것을 이런 침묵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좀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좀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며, 권력이 없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자신들의 말을 좀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신의 말로 당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은 훨씬 더 많다”고 말한다. 권력을 가진 남성, 이성애자의 혐오발언과 권력이 부재한 여성, 동성애자 등의 침묵의 비대칭은 흡사 주인과 노예에 비유된다.

  주인은 노예에게 명령하거나 충고할 수 있다. 주인은 노예의 어떤 식의 행위의 허용을 승인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노예는 주인의 허용을 승인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노예는 주인에게 애원할 수 있지만, 주인에게 명령할 수는 없다. 권력 균형의 비대칭은 특정한 발화수반행위를 수행하는 그들 능력의 비대칭에 반영된다. 노예에 의한 명령이나 금지의 시도는 오스틴(J.L.Austin)적인 의미에서 항상 부적절할 것이다. 그러한 행위들은 노예에게 있어 불가능하다.
 

대항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버틀러(J.Butler)가 보기에 이러한 견해는 기존 권력 관계를 고정적으로 사유하는 보수주의와 공모하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언어가 단지 기존 권력 관계를 재현하거나 혹은 이런 권력 관계가 재생산될 수 있는 종속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혐오표현의 피해자들을 무기력하게 피해자화 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랭턴과 달리 “발화가 기존의 정당성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들, 발화가 발화 그 자체의 결과로서 정당성의 측면에서 어떤 변화를 수행적으로 낳는 순간들은 있는가”라고 대항표현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그 행위와 상처 간에는 저항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간격(Gap)이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되받아쳐 말하기(Talking Back)가 가능해진다. 이는 대항발언(Counter-Speech), 즉 일종의 되받아쳐 말하기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따라서 혐오발언의 청자(혹은 피해자)는 이렇게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극을 활용해 발언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서 말하거나, 언어가 도용과 기생에 취약하다는 점을 활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

  대항표현은 어떻게 가능할까. 버틀러는 “수신자는 예측 불가능하거나 ‘기생적인’ 방식으로 언어의 힘에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침묵 당하거나 수치 당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너 김치녀지?”와 같은 혐오발언에 “응 맞아 나 완전 김치녀야!”와 같이, 혐오 발화자가 예상치 못한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대응하거나, 원본 혐오발언을 도용하고 기생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혐오발언은 그 용어에 대한 공격적인 재전유, 혹은 담론적 저항을 통해 이의를 제기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런 대항발언의 사례로 ‘퀴어(Queer)’라는 말에 대한 전복을 꼽고 있다. 원래 퀴어라는 용어는 동성애자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비하적 용어였다. 그런데 이를 동성애자 공동체가 긍정적으로 전유해, 낙인과 비하에서 축하와 긍정의 의미로 전복시켰다. 이렇게 동성애자를 침묵시켰던 ‘퀴어’라는 용어가 긍정의 의미로 전유 되는 경우, 화자가 더 이상 퀴어라는 발화행위로 침묵 시킬 수 없어 역으로 혐오발화자가 침묵 당하기도 한다.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이런 대항표현이 꼭 개인적인 대응방식일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대항표현 연구자인 캐서린 겔버(K.Gelber)는 저서 ≪Speaking Back: The Free Speech vs Hate Speech Debate≫(2002)에서 다음과 같이 집단적인 대항표현의 사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혐오발언 행위가 발생했다면, 피해자 또는 피해자 집단은 인근 지역 내에 배포할 신문 등을 제작함으로써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중략) 만일 어떤 혐오발언 행위가 직장과 같은 좀 더 공적인 장소에서 발생했다면, 예비 대응 화자는 그 직장 내에서 반인종차별 프로그램의 개발을 도울 수 있다. 만일 언론에서 혐오발언 행위가 발생한다면, 대응화자는 동일한 시청자 또는 구독자에 도달하는 동일한 매체에 반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여성혐오발언이 여성들을 꼭 파괴하거나 침묵시키고 종속시키지 않을 수 있음을, 여성들이 결코 영원히 침묵 당하는 존재가 아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혐오발언은 물론 “건네받은 자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행위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자신의 예측되지 않은 잔여로서 침묵 된 자들의 어휘 내에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은 그 말이 작동한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사용에 있어서 저항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대항표현의 사례다.

  이 같은 대항표현은 피해자로 하여금 침묵시키는 효과를 극복하게 해줄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발화자를 침묵시킬 수도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비록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상처의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이름-부르기는 대항-운동을 개시하는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혐오발언은 따라서 양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대항발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는 여성 억압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 운동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여성을 침묵시키려는 혐오표현에 대한 되받아쳐 말하기로서의 말대꾸, 대항표현은 그 하나의 사례다. 이제 수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는 일들을 목도하고 있음이 그것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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