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점진적 발전은 일상의 편리함을 선물하지만, 우리들의 정신은 점점 지쳐만 간다. 다양한 자극들은 우리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고, 심리적·물리적 압박감을 느끼게 해, 정신건강 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에도 위협을 주고 있다. 이 기획을 통해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관해 다양한 학문적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현대인의 정신건강 ② 정신의학 영역: 통섭으로 ③ 신경미학: 새로운 패러다임 ④ 정신건강의 이론과 실제
 

 

현대사회,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관하여

권영우 /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 요소로, 발전된 과학기술을 꼽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본질적 특징이 과학기술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결과물’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대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는 밀접해졌다. 과거 인류가 처했던 척박한 삶의 환경과 달리 현재 인간은 매우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게 된다. 사회는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정작 사회 속 개인들은 과거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과거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정신적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먼저 과학기술의 발전의 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의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을 끝없는 욕망의 도가니 속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인간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 여겨지는 심리학과 사회과학이, 인간을 통제 및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소거시키고 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비시대 속 개인: 욕망의 무한자극과 개인의 고유성 상실

  현대사회 속 인간은 온갖 화려한 상품들의 범람과 그것을 소비하게끔 자극하는 상업적 광고 속에서 무엇을 소비해야 할지,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소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비 자체가 삶의 목적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보드리야르(J.Baudrillard)가 현대사회를 “소비의 사회”로 분석한 바와 같이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욕망을 채우는 중요한 수단이자,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대중’ 없이 지탱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소비와 함께 대량생산과 과학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상품개발이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다. 기업들은 과학기술 발전을 이용해 더 좋은 상품을 개발하고 더 많이 판매하지 않으면 시장경제체제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기업들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상품을 앞 다퉈 개발하고 생산해 그 상품이 소비될 수 있도록 현대사회 속 개개인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는 심해지며, 한 개인의 소비역량은 한정적인데 반해,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들은 도처에서 넘쳐나게 된다. 심지어 현대사회는 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인간을 우월하며 잘 사는 인간의 표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이러한 인간이 되라고 전방위적으로 종용하고,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성공의 모델로서 보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인간을 꿈꾸도록 만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될 수 없는 현대사회 속 개개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부분 좌절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되거나 ‘내’가 아닌 ‘그’가 될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계속 꾸며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아도르노(T.Adorno)와 호르크하이머(M.Horkheimer)가 쓴 《계몽의 변증법》(1944)에서 몰개성화된 개성으로 잘 설명되고 있다.

  결국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다가 비정상적 형태로 의식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현대사회 속 개인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발전된 사회 속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점점 더 헛헛해지는 삶의 조건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주의시대 속 인간: 자율성의 상실과 인간의 물리적 대상화
 
 

  우리는 흔히 정신건강의 문제를 심리학이나 신경정신과적 연구와 진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리학을 포함해 사회과학 및 신경생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소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는 학문들은 모두 인간을 자율적 존재라기보다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물리적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연구들의 성과와 결과물들은 20세기에 들어 방대하게 축적됐으며 현재도 엄청난 연구 성과물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 성과물은 인간행동에 관한, 특히 소비행동에 관한 실제적 적용으로 이어지고 앞서 언급한 기업의 상품광고와 홍보 및 마케팅과 경영이론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심리학의 발달은 오히려 현대인의 정신건강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원칙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정치학 등도 결국에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인간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전제 속에는 ‘인간의 마음에 고유성이나 자율성은 없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 주장의 배경에는 스키너(B.Skinner)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주어진 자극에 반응한 결과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 정신의 자율성은 배제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치 특정 원인이 주어지면 특정 결과가 생기는 물리적 현상처럼 예측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교육을 통해 아이를 원하는 인간으로 주조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 성과가 경영학 등과 같은 여러 사회과학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도 물리적 대상의 운동처럼 일관된 법칙에 따라 설명되고 파악될 수 있다는 일종의 신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인간의 자율성을 찾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자율성이 소거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그리고 자율성이 소거된 ‘내’가 나만의 꿈과 가치를 실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현대사회는 많은 영역을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여 미시적 그리고 거시적 사회집단을 조직하고 운영하며 그 틀 안에 개개인을 가둬 놓는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풍요로운 상품이 넘쳐나는 자본주의 시장사회는 끝을 모르게 발전하지만, 정작 그 속에 사는 개개인의 마음은 빈곤해져만 간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인간 자신의 행동과 사회를 더 많이 알게 됐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인간의 자율성은 소거되고 철저히 물리적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그리스 고대 서사시인 《오디세이》에서 그려진 것과 같이 암초가 가득하고 사이렌이 도사리는 해협을 지나야하는 오디세우스와 같은 처지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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