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영 /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문화_TV와 대중문화 ④ 광고, 광고가 구성하는 대중]

 현재 한국 대중문화 미디어의 중심에는 TV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TV가 제공하는 대중문화 컨텐츠에 대한 비판적 ‘독해’는 실천적 지성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기획에서는 그러한 비판적 독해 몇 가지를 4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행복의 환상, TV와 가상체험 ② 파국의 은유, 서바이벌 프로그램 ③ TV 드라마, 그들이 막장드라마를 보는 이유 ④ 광고, 광고가 구성하는 대중

 

텔레비전 광고, 의미투쟁의 장

황지영 /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모든 텍스트는 정치적이고 모든 이야기는 이데올로기적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마슈레(Pierre Macherey)의 주장은 광고텍스트가 의미투쟁의 장임을 시사한다. 이야기란 무언가 진실을 말할 것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기획을 전제한다. 광고에서 구성되는 페미니즘담론, 기부담론, 월드컵담론에서 페미니즘, 기부 그리고 월드컵의 의미는 변조된다. 광고에서 페미니즘은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 혹은 ‘취향’을 의미하고 기부는 ‘권력’을 의미하며 월드컵은 ‘집단무의식’과 ‘집단적 치유’를 의미할 수 있다.

페미니즘, 그것은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

 2015년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P&G의 ‘Like a girl’캠페인은 여성·여성성에 부여하는 부정적인 의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으로서 페미니즘을 차용하고 있는 이 광고 캠페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항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자유’ ‘해방’같은 용어가 90년대 여성 위생용품 제조자들이 제공한 상품의 의미였으며, 페미니스트담론은 광고 산업에 의해 교묘하게 상업적으로 채택됐다는 사실이다. P&G 광고 캠페인에서는 “소녀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라고 질문하는 여성 프로듀스의 목소리와 그에 답하는 소녀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개되는 능동적인 자기 변화, 즉 대상에서 주체로 옮겨가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광고는 소녀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광고는 페미니스트 비평가의 시각에서 볼 때 오독의 여지가 보인다. “나는 소녀이므로 소녀처럼 차고(kick), 던지고, 달린다”는 목소리는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기술하는 동시에 성차이데올로기를 재구축한다. ‘소녀는 소녀처럼’이란 동어반복은 ‘생물학적 자기동일성’으로 회귀하는 친숙한 운동이다.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 압축 방식을 통해 텔레비전 광고가 보여주는 ‘질문과 자각의 놀라운 마법적 효과’는 소녀 혹은 여자들이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광고에서 재현되는 여자의 자각은, 역설적으로 여자들의 정치적 연대라는 페미니즘 정치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소녀처럼이 놀라운 것(amazing things)을 의미하게 만들자”는 의미투쟁의 목표설정은 단지 의미의 모호성과 그로 인한 수행의 무능을 지시한다. 광고텍스트에서 침묵하는 목소리는 없지만, 목소리에는 젠더의 지형을 넓힐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부광고, 우리의 의식을 검열하는 판옵티콘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개척지는 어디일까. ‘성장 없는 번영’이란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 자본주의 4.0패러다임의 대중적 버전인 기부는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게릴라처럼 텔레비전의 일상을 점령한 기부광고의 도덕적 검열이라는 폭력 앞에 무방비상태로 놓인다. 기부광고에서 자본주의는 ‘정상’ ‘건강’을 의미하는 반면 아프리카는 ‘비정상’ ‘불구’ ‘병듦’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문제로 규정되고, 자본주의 내부의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시민은 누구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생존은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를 만든다. 타자의 몸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기부광고에서 확립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시선’이다. 타자의 몸을 시선의 통제 아래 두는 과도한 하이앵글, 이들의 정신을 검열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등은 그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기부광고라는 판옵티콘적 시선은 텔레비전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의 의식을 도덕적으로 검열한다. 광고는 노골적으로 “15초 후엔 또 한 아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방금 한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쉼 없이 던진다. 모든 기부자들을 ‘동일화’의 논리로 묶고 기부의 주체성을 허용치 않는 기부광고의 도덕주의적 명령은 불편한 것이다.

 
 

월드컵광고, 한(恨)의 사라짐과 ‘우리성’의 돌아옴

 문화비평가들은 2002년 월드컵을 탈코드화된 전복의 공간, 평등의 카니발적 공간으로 해석한다. 당시 광고들이 보여준 과도한 문화적 상징 기표들의 생산과 “우리가 누구입니까” “모두가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와 같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감정표출은 여전히 비평가의 관심을 끈다. 일련의 광고들은 축구계 변방이라는 ‘한국 축구의 열등감’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려는 집단적 ‘한풀이 과정’과 감정 구조를 구축했다. ‘정’ ‘한’ ‘우리’와 같은 한국적 문화적 가치가 월드컵에 편승하는 광고들 속에서 과도하게 표출된 것은, 한국팀의 4강 진출이란 상황변수, 10·20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붉은 악마란 하위문화의 실천, 그러한 응원문화에의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전개된 해석들과 상징재생산의 복합적인 산물이다.

 기호의 소비과정은 문화적 실천과정이다. 대중의 문화적 욕망을 번역한 것이 월드컵 기간 동안 광고에서 재현된 한국적인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란 호명은 한국인의 심층심리 기저에서 작용하는 집단적 무의식을 불러내는 기제로 작용했다. 이 과정을 통해 광고는 대중의 문화적 참여를 조직하고 선동하는 대중문화 창조자란 가면을 쓴다. 마케팅과 국가이미지 그리고 광고효과를 초월해 2002년 월드컵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대중의 감정이나 문화적 실천과 연결되기 위해 광고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포괄적인 문화적 기회를 제공했다. 이 시기 광고에서 사용된 상징들과 집합적 재현은 한국인의 일상적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집단무의식과 공명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문화의 장으로서 광고는 현실 문화를 상징적으로 재구성하고 대중의 정서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하나 됨’이란 집단주의적 감정을 생산해 낸다.

 생산자들이 의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산물들을 조합하거나 변형하고 정반대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브리콜러(bricoleur)들처럼, 광고는 능숙하게 자신에 대한 공격자의 의미투쟁 전술을 차용한다. 광고의 기의변조(bricolage)는 평등과 성차를 동시에 접합하는 것이며, 식민주의와 휴머니즘을 간단히 접합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광고의 힘은 정반대의 것을 포섭하고 전유하는 것에서 나온다. 광고텍스트를 이데올로기의 재구성과 갈등의 영역으로 전제하면, 광고가 헤게모니 투쟁의 텍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광고를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광고는 다시 한 번 대중의 일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타자들의 문화의 영역을 재탈환할 진지전을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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