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 영화평론가

 

원우연구: 『듀안 마이클스 비주얼스토리텔링에 나타난 비선형적 메타-구조의 존재론적 고찰』 정훈 著 (2017, 사진학과 다큐멘터리사진 전공)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됐다. 이번호에서는 사진학과 정훈 원우의 박사 논문 『듀안 마이클스 비주얼스토리텔링에 나타난 비선형적 메타-구조의 존재론적 고찰』을 통해 사진 행위에 있어 능동적 사진 읽기와 주체-관객으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을 나눠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토론문]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를 넘어서

조형래 / 영화평론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대상은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를 기초로 하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에 의해 의미와 질서가 부여되고 정위(定位)되며 식별 가능한 것이 된다. 즉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각체제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는 회화는 물론 사진이나 영화와 불가분적이다. 예컨대 우리가 사진을 볼 때면 시각체제에 입각해 2차원 평면에 물질적으로 새겨진 색상 또는 점선면의 얼룩으로 망막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삶의 경험과 불가결하게 연루될 수 있는 입체적으로 의미화된 기호로서 읽어내는 것이다.

  모더니티의 시각체제가 전제하는 시각 주체의 전례 없는 특권화에 기초해 과학혁명 등의 유례없는 혁신과 세계사적 전환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에 의해 억압된 것 일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과하게 하는 통념과 공통감각(common-sense)의 양산을 통해 제약으로 작용을 한 것 역시 진실이다.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주체가 객관을 응시하고(gaze), 장악하며, 전유하는appropriate) 유형 또는 무형의 제도화된 관행과 밀착돼 있는 시각체제 너머의 다른 차원과 실재(real)를 본다는 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이지 않고 또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징후와 가능성을 둘러싼 여러 철학적 담론과 시각문화론이 제기됐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정훈은 이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진을 사례로 들어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도발적으로 제기해온 논자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을 예로 들어, 모더니티의 시각체제에 근거한 일상세계에사 일반적으로 파악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불가해한 ‘여운’을 읽어내 ‘사고-감정’이라 명명한 바 있다. 이러한 형언 불가능한 것들은 마이클스의 시퀀스 사진이 구현하고 있는 관객 참여 형식을 통해 간파될 소지가 있다. 이러한 푸코의 논의를 발전시켜 정훈이 마이클스의 시퀀스 사진에 대해 급진적으로 의미 부여해 들뢰즈를 매개로 독해하고자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기성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히 요약이 어려움에도 그의 논지를 따라가면 대강 이렇다. 첫째, 마이클스의 시퀀스 사진은 그와 관객의 사유형식의 공조를 유도하는 특별한 비주얼스토리텔링의 형식이다. 둘째, 그 비주얼스토리텔링은 사진을 생산자-소비자라는 시각적 의사소통의 폐쇄적·선형적 구조라는 일반적 통념에 전적으로 반하는 ‘열린 공간’을 마련한다. 사진가와 관객은 동격의 사진 행위자로서 거기에 참여한다. 셋째, 여기서 관객은 마이클스의 사진-텍스트를 거울삼아 모더니티의 시각체제 너머의 비자발적 기억의 잠재성과 접속하면서 불수의적인 계열체로서의 낯선 의식 및 기억과 조우하며 확장을 체험한다. 이것이야말로 관객 스스로가 열어가는 비선형적 메타-구조의 공간으로,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의 중심이 된다.

  정훈에 따르면 마이클스의 시퀀스 사진 및 사진-텍스트는 프레임 안팎, 시각적 이미지와 그 의미, 사진가와 관객이라는 명확한 구분에 입각한 사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근본적으로 내파하는, 사진 형식의 자기 혁신에 관한 단적인 사례가 된다. 즉, 사진은 사진을 매개하는 그 일체의 요인들의 능동적 참여와 교차가 이루어지면서 서로 간 경계를 부단히 협상하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재정의된다. 마이클스의 비주얼스토리텔링은 사진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통념을 부단히 탈구축하면서, 사진이라는 형식이 잠재적으로 담보하고 있는 일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사례라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것은 모더니티의 시각체제 너머의 불가해한 물자체(Ding an sich) 또는 실재의 자국과 흔적을 지금-여기로 끌어들이려는 분투이자, 날로 심화되는 사진의 물화 및 대중문화적 트렌드화를 극복하는 예술적·담론적 대안으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이 논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마이클스의 작업 및 그것에 관한 푸코의 논의가 이루어진 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면 사진 및 시각문화론 일반에 대한 근본적인 탈구축의 가능성이 실천됐음은 물론 담론적 논의의 단초 또한 제기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사진의 물화 등의 문제는 개선의 여지를 보이기는커녕 날로 심화돼 가고 있는가. 환원하자면 일상적 차원에서 사진을 둘러싼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는 어째서 아직도 완강한가. 둘째, 정훈의 문제 제기에 입각했을 때 한국 현대 사진의 현황은 어떠한가. 마이클스의 경우와 상응하는 사례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21세기 한국 현대사진에 있어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모더니티의 시각체제에 기반한 선형성-인과론의 일반론에 의지하기는커녕 그것의 내파를 도모하는 글쓰기 형식으로 인해 본문을 전부 이해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오늘날 한국의 학문 세계에서 널리 권장되고 있는 소위 “역사적 연구”가 아닌, 이론적 논의의 한 진경(珍景)을 목도하면서 황홀하게 어지러웠다는 소감을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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