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관 /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과학]A.I.: 인공지능과 미래 ④ 인간과 기계의 공(共)진화

  지난해 치러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에 세간의 관심은 높아져 갔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시키려는 노력 역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제 인공지능 기술의 완전한 실현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성큼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지면은 앞으로 도래할 인공지능기술과 여러 분야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인공지능에 관하여 ②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역할 ③ 예술을 창작하는 기계, 인공지능 ④ 인간과 기계의 공(共)진화

 


인공지능과 지성, 그리고 인간 역사의 미래

이종관 /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최근 인공지능과 관련해 인간의 미래에 대한 첨예한 논쟁과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즉, 인공지능이 현재와 같은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인간의 능력을 손쉽게 능가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상에 관해 인간이 맞이할 운명은 크게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나뉜다. 낙관론의 경우는 고도화된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어려운 난제들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비관론의 경우 인간의 위치를 인공지능이 모두 대체하면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지배당하는 역전 관계로의 비극적 미래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론과 비관론 논쟁은 사실 소모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인공지능의 수준을 기준으로 인공지능의 미래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예언으로서 설득력이 부족할뿐더러, 어느 누구도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 나아가 공진화(coevolution)라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그로 인한 포스트 휴먼(PostHuman)관은 우리의 예언적 확신의 대표적 표상으로 드러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말 그대로 고도로 발달된 기술의 세례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모호해진 신인류 담론이다. 그리고 인간 성능 증강이라는 도구주의적 자세를 통해 초월적 인간으로의 거듭남이 포스트 휴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모두는 지능이라는 개념에 눈먼 기술중심주의와 도구 만능주의적 태도로, 거대 자본과의 유착 관계 속에 개발 및 발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성, 인간에 대한 진정한 고민의 시작

  우리가 진정 논의해야 할 점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단순한 융합(convergence)이 아닌 융화(harmonizing) 차원의 접근이다. 그 결과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진화 담론이 단순히 인공의 지능(intelligence)에 관한 리스크 관리 차원으로서의 예언적 논쟁에 그칠 뿐, 진정 중요한 문제인 지성(intellect)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지능의 차원을 넘어선 지성적 차원의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지능은 무엇이며 지성은 무엇인가. 이미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일상의 언어는 지능과 지성의 차이를 알고 있다. 지능적 범죄라는 표현은 있어도 지성적 범죄라는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능과 지성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이는 현대 인지과학이나 정보공학에서는 논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문들은 인간의 능력을 오직 지능에 국한시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과 지성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칸트(Immanuel Kant) 이후 독일 관념론 철학의 혜안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1788)과 <판단력비판>(1790)이라는 저서, 또 셸링(Friedrich Schelling)이란 철학자의 선험철학과 자연철학에 관한 저서는 지능을 넘어선 인간의 지성 밝혀내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지능을 칸트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오성(悟性)에 속하는 능력으로, 계산과 논리적 추론의 영역이다. 이러한 능력은 정해진 알고리듬(algorithm)이나 규칙을 단순히 따르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손쉽게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은 셸링이 시사하듯 ‘비판적 성찰’과 ‘숭고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입출력의 논리적 추론을 넘어서는 지적 성찰과 사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렇게 지능을 능가하는 지성의 능력이 있기에 지능의 영역인 단순한 논증이나 계산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 영역이 바로 도덕과 예술의 영역이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이해득실 계산에 예속되지 않고 타인들을 배려하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희생시키는 자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한다. 또 우리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어떤 숭고한 감동을 받으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인도된다. 몇 년 전 국내에 전시된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고백하듯 그의 작품 앞에선 많은 사람들이 삶의 근원에 대한 숭고한 감동을 공유한다. 이 모든 것은 계산과 논리적 추론으로는 실행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차원이다. 그렇기에 지성은 기계나 컴퓨터가 도저히 시뮬레이션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다.


인공의 지능이 아닌 인간의 지성을 위해

  불행하게도, 오늘날 지성의 전당이라고 불렸던 대학에서조차 지성에 관한 논의는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대학에서 연구 개발되어야 할 것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거나 그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으로 꼽히고 있다.
  

 
 

  사실 인류의 미래와 관련해 심각한 위기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역사에서 추방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공의 지능을 공학적으로 제작하려는 시도의 바탕에 어떤 인간관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 대학에서조차 비판적으로 간파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도 역시 트랜스휴머니즘이 추진하는 포스트 휴먼 인간관이 침투해 있다. 이러한 인간을 포스트 휴먼으로 제작·진화시키려는 인간관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이유를 오직 인간의 지능에서만 포착한다. 이를 통해 지능을 공학적으로 더 진화시킴으로써 기존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미래의 인간을 탄생시키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 휴먼 인간관은 실로 인간에 대한 지극히 편협한 이해와 역사 속에서 지성이 해온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지성에 대한 고민과 깊은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보다 더 도덕적인 가치나 숭고한 차원을 향한 도전을 이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가 아닌 승화의 과정이다. 역사의 승화를 이끌고 가는 주체는 인간의 지능이 아닌 지성이다.

  지금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논의는 인간이 과연 더 편안하고 안락해질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것인가에만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할 문제는 인간의 지성에 관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만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개발된다면, 이는 역사가 지성을 상실하고 망각하는 미래로 향하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이는, 도덕적 가치나 숭고한 미를 향한 역사의 발전은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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