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구 / 가톨릭대 국사학과 강사

원우연구: 『13-14세기 여몽 접견지역 고려인 세력 연구』 오기승 著 (2017, 역사학과 한국사 박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됐다. 이번호에서는 역사학과 오기승 원우의 논문 『13-14세기 여몽 접견지역 고려인 세력 연구』를 통해 당대 지역 세력 간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토론문]


너머의 사람들, 경계인들의 이름을 불러 꽃을 피우다


강재구 / 가톨릭대 국사학과 강사

  최근 고려시대사 연구에 있어 13-14세기 고려와 몽골 관계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소위 ‘원 간섭기’로 잘 알려진 당시의 역사상은 민족사적·일국사적 역사서술에 대한 재고와 동시에 몽골제국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잇달으며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시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전쟁과 지배-복속, 왕실 간의 통혼, 왕조체제와 행성체제(원의 지방지배기구)의 공존 등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의 특성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對 국가” 혹은 “민족 對 反민족”과 같은 이분법적 시각보다는 확장된 종합적 이해를 요한다. 오기승의 〈13~14세기 여몽 접경지역의 고려인 세력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성찰과 방대한 자료 분석 및 합리적 해석이 돋보이는 옥고라 볼 수 있다.

  오기승이 주목한 접경지역의 고려인 세력은 13-14세기 여몽 관계의 진폭 속에서 존재했던 경계인들이다. 그들은 고려인으로서, 고려국가의 변방 혹은 외부에 위치했던 다른 이름의 고려인이었다. 역사학은 결국 시간(時間)·공간(空間)·인간(人間), 三間의 학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주목할 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먼저 13-14세기라는 시점에 주목해보자. 이 시기는 잘 알려져 있듯 전대미문의 강대함을 자랑하던 몽골제국이 세계를 제패했던 시기다. 고려가 이러한 몽골과 30여 년간의 전쟁을 치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외침에 맞선 민족의 거국적 항쟁과는 다른 측면도 있다. 많은 고려인들이 몽골의 침공에 저항했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에 투항해 협력하기도 했다. 오기승은 ‘민족’이라는 근대적 관념과는 거리를 두고 당대의 시선에서 이들의 선택을 분석했다. 투몽행위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보다는 그들이 고려국가로부터의 이탈한 유형과 방식을 분석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이탈자들이 고려의 영역 외부에서 정치세력화됐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여기에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간과할 수 없겠으나, 투몽이 변경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집단적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교적 뚜렷한 정치적 행위였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투몽현상은 여몽전쟁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전쟁 이후에는 고려 내의 하층민들이 동녕부나 쌍성총관부와 같은 몽골관부에 붙거나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하는 방식으로 지속됐다. 이로써 접경지역의 고려인 인구가 증가하자 고려조정에서는 그들의 유출을 막는 동시에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러한 측면은 몽골이 동녕부나 쌍성총관부와 같은 방식으로 고려의 영역을 잠식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요동의 범위가 확장된 것으로 오해되기 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요동과 한반도 북부가 오늘날의 지리 감각처럼 분명한 경계선이 존재하는 이질적인 공간은 아니었을지라도 두 지역을 등가적인 의미에서의 ‘접경지역’으로 포괄할 수 있을까. 고려와 요동 간의 내부 접경지인 한반도 북부지역과 중원과 한반도 간의 외부 접경지인 요동지역을 동질적인 차원에서 수렴할 수 있을까. 접경지 내에서의 지역적, 기능적 층위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요동이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다양한 정치세력들의 상호관계를 규명해냈다는 점이다. 오기승이 논한 것처럼, 다양한 경로로 형성된 요동 고려인 세력은 그들 내에서도 경쟁 관계이기도 했거니와 동방 3왕가와 같은 몽골의 종왕세력, 요양행성과 같은 지방 지배기구, 심양왕 등 13-14세기 요동에는 매우 복잡하고 또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서로 그 세력과 권위의 원천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 역시 상이했다. 이러한 복잡성은 사실 고려-몽골 관계 연구의 최대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기승은 요동 내 정치세력 간의 관계 속에서 요동 고려인 세력이 가지는 역사적 위상에 대한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했다. 요컨대, 그들은 스스로 목적이 되지 못하고 수단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었다. 제국의 내부에서 나름의 정치적 자율과 권력을 부여받았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제국의 일부로서 그와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이것이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다). 혹 이러한 평가가 적절하다면, 토론자 역시 오기승의 결론에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E.H.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언명을 남겼다. 하지만 토론자는 그보단 김춘수의 시 한 구절이야말로 역사학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역사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과거의 사실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를 불러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오기승의 논문은 고려인이면서도 고려의 변방 혹은 외부, 너머의 존재들이었던 경계인들에게 제 이름을 불러 꽃을 피우게 했다는 점에서 뜻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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