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달오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교수칼럼]


강단으로부터의 사색

홍달오 /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내혜홀의 아름다운 캠퍼스에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신학기 캠퍼스의 활기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 식지 않은 여름 햇빛의 여운도, 학생들의 밝은 얼굴에 구김살을 드리우지는 못한다. 하루 강의가 끝나고 안성캠퍼스의 산책로에서 가을 햇살을 만나기 위해 연구실을 나서면, 삼삼오오 모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 사이를 걷게 된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그들 곁을 스쳐갈 때면, 때로는 의도하지 않게 대화 내용을 엿듣기도 한다. 그때마다 학생들의 언어 습관을 부지불식간에 분석하게 되는, 국어학 전공자로서의 직업병(?)이 도지고 만다. 그런데 문득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온다.
 

“아아, 정말 요즘 개힘들어.”


 여러 학생들의 말을 듣다보니 눈에 띄는 표현이 있다. 무언가를 강조할 때, 접두사인 ‘개-’를 너무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원래 ‘개-’는 ‘개망신’ ‘개망나니’ 등 부정적인 뜻을 지니는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함’을 나타내는 접두사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에게는 이 ‘개-’의 용법이 언어생활 전반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인 심리 형용사 앞(‘개짜증난다’ 등)에 붙는 것을 넘어 형용사 전반(‘개멋있다’ 등)에 붙어 쓰이며, 심지어는 동사(‘개먹었다’ 등)에 부착되기도 한다. 거의 부사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또 평소 좋아하는 포도주를 사러 갈 때면 앳된 얼굴의 직원이 이렇게 말한다. “손님, 여기 이 와인은 참 향기가 좋으시고요, 저기 저 와인은 정말 부드러우세요.” 이것도 참 흥미로운 어법이다. 우리말에서 이렇게 상품을 존대하여 청자를 높이는 대우법이 존재했던가. 우리말에 “선생님 안경이 참 멋지시네요”처럼 듣는이의 소유물이나 부착물을 존대하는 습관은 있지만, 상품을 높이는 어법은 없다. 강의 도중 학생들에게 ‘이러이러한 이상한 표현이 있다’고 소개했더니, 자기들도 자주 듣는 말이라나. 카페에 가면 아르바이트생들이 커피를 내주며 “여기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단다. 어쩌면 이 상품을 높이는 대우법은, 단지 그 상품을 이미 손님의 ‘소유물’로 간주하여 그 상품을 사게 만들려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치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우리의 세태를 반영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언어학자는 언어 사용 실태를 관찰할 때 가급적 가치 판단을 배제해야 한다. 언어학자의 본분은 그 사용의 잘잘못을 따지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언어 현상을 분석·기술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 한 편이 서늘해져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통해 감정 상태를 전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품을 사람보다 높여야 할 만큼 우리 사회가 각박해진 것인가 싶기 때문이다.

※ 내혜홀: 경기도 안성의 옛 지명(地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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