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7.10.11 수 20:35
기획정치
[정치] 새로운 진보정치의 공간을 열어야 할 때
조현준 편집위원  |  dision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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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승인 2017.09.26  16: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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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상반기의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조기 대선으로 이룬 정권 교체일 것이다. 정치적 공론장의 탄생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축되는 과정에 있고, 개인이 정치적 시민 의식을 ‘실행’하는 경험 역시 진행 중으로 보인다. 이 기획에서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 정치에 대해 네 차례에 걸쳐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파국과 ‘재생’ ② 진보와 보수 ③ 정치政治와 공공정책 ④ 정치적인 인간, 그리고 인간적인 정치

 

새로운 진보정치의 공간을 열어야 할 때


박치현 / 사회학 박사, 충남대 강사

  한국 정치를 보는 시각을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는 용어들은 아마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압도적인 보수 우위의 정치구도 하에서 진행돼왔다. 지난 9년간의 소위 ‘보수’ 정권을 거치는 동안, 많은 정치학자들과 정치평론가들이 보수 우위의 구도가 매우 견고하다고 보면서 보수장기집권을 예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예측은 2016년 10월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어진 촛불혁명, 그리고 초유의 대통령 탄핵·파면과 야당지도자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으로 순식간에 빗나가버렸다.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정치구도가 심대하게 변한 듯 보이기도 하고, 변화에 대한 기대도 피어나고 있다. 이후에도 기존 보수세력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지금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인물들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도 존속될 수 있을까. 현재 집권하게 된 소위 ‘진보’ 진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국회의 의석수는 국민들의 지지율과 현격히 괴리되고 있다. 국민과 청와대는 바뀌었지만 국회는 촛불 이전 체제 그대로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될까.
 

한국 보수의 미래


 먼저 보수세력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한국 보수주의는 아마도 ‘반공주의’와 ‘시장주의’가 핵심 이념일 것이다. 물론 최근 드러나는 지난 보수정권의 부패와 정치공작의 실상은, 한국 보수가 실은 이념공동체기보다는 이익공동체임을 드러낸다. 다만 그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어쨌든 반공과 시장 이념이다. 2012년 대선에서는 보수진영에서도 ‘복지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듯했지만, 박근혜 집권 이후에는 철지난 반공주의에 절대적으로 치중했다. 결국 지난 정권에서는 시장을 핑계로 한 부패 고리 부활, 반공을 활용한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댓글조작사건),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지원하는 언론의 전면전이 펼쳐졌다. 정권 비판은 법적 언론이 아닌 팟캐스트 방송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보수주의의 핵심은 ‘공동체’다. 여기에 반국가(최소국가)와 개인의 자유 강조가 덧붙여진다. 물론 한국의 보수에게 공동체 강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공동체를 박정희 향수나 북한 비난을 활용한 남한국가공동체 정당화, 또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모든 부담(대학등록금, 출산과 육아 등)을 떠넘기기 식으로 ‘동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시장 보수조차 결국 대기업에 대한 편파적인 옹호, 부자증세 반대, 분배보다 성장에 대한 압도적 강조 등 시장질서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사유도 없다. 이들도 앙상한 반공국가주의에 기댈 뿐이다. 보수의 공동체 강조와 시장에 대한 의존이 서로 모순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민주화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있는지, 민족주의적인 입장인지도 의심스럽다. 아마도 반(反)민주화 세력으로 보이는 것이 한국 보수의 가장 큰 취약점일 것이다. 국정원 선거개입이나 공영언론 통제는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위협하는 행위다. 그동안 너무나 손쉽게 반공이라는 입장이 민주를 무력화시키는 논리로 활용됐다. 국정화 교과서나 위안부합의, 사드(THAAD) 도입 과정에서는 심지어 이들은 반(反)민족적으로 보였다. 현대사에서 이들은 너무 손쉽게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해왔다. 아마도 그래도 되니까 그랬을 것이고, 이는 그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게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웰빙보수’란 말은 설명력이 있다. 만일 이러한 진단이 사실이라면,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기존 한국 보수를 ‘극우파’로 부르는 것이 정확한 호명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 보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새로운 보수를 외치긴 하지만 새로운 사유가 관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역주의나 반공주의 같은 옛날 것에 다시 버릇처럼 의존하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


기존 보수를 ‘극우’로 볼 경우, 기존의 좌/우, 진보/보수 프레임은 과연 타당한가. 기존에 진보나 좌파로 불려왔던, 정당으로는 민주당에 의해 대표되는 한국의 민주화 세력, 즉 자유주의 세력을 일단 ‘보수’ 또는 ‘우익’으로 보는 것이 앞으로 발생할 현실을 설명하는데 더 적합할 것 같다.

 《분단체제와 87체제(창작과 비평, 2017)》의 저자 김종엽에 의하면 촛불혁명은 87년체제의 복원을 지향하는 ‘보수(保守)적’ 시도였다. 87년 민주항쟁 당시에도 중요한 문건들은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 수립’을 외친 바 있다. 촛불혁명에서의 87년헌법은 그야말로 ‘정상적인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87년체제의 회복이야말로 촛불혁명의 보수적 성격, 즉 형식적 민주주의 회복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실 진보적 의제들은 제대로 주목받거나 거론되지도 못했다.

 최근에 민주화 진보 세력의 기원을 학병세대 우익에 두는 흥미로운 논의도 제출되었다. 국문학자 김건우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 책방, 2017)》에서 1920년대 초반에 출생해 40년대에 20대를 보냈기에 ‘친일’이라는 부채도 없고 해방공간의 열린 담론지평 속에서 ‘반공주의’라는 족쇄에도 빠지지 않았던 ‘학병세대’들에 주목하고, 이들을 한국 우익의 기원으로 삼았다.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우익과, 학병세대 우익은 매우 다르다. 사실상 장준하, 김교신, 김준엽, 김수환, 김수영, 류달영 등은 진보 및 민주화세력에 가까운 삶의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민족주의적이고 비공산주의적인 보수파(이들은 분명 좌파도 아니고 공산주의에 동의하지도 않았다)가 존재했다고 보면, 기존의 좌우 프레임을 전환할 역사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김건우는 지금의 ‘좌우’ 프레임은 해방 후 극우세력이 만들어낸 것이며, 그 전사(前史)로 친일세력이 우익을 독점하려한 작업이 있었다고 과감히 주장하여 기존 프레임의 해체를 요구한다.
 

   
 

좌우(左右)의 새 기준


 우리가 87년체제를 넘어서는 작업을 시작하려면 우선 진보와 보수의 기존 구도를 ‘전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테면 현재의 진보진영들도 여전히 ‘민족’ ‘국가’ 혹은 ‘남성’이라는 상징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시장주의와 발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를테면 소득주도성장). 이들을 이제 ‘보수’라고 봐야하는 것이다. 여전히 진보적 정치인들은 대중들과 지지자들을 부를 때 ‘국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국민 개념은 외국인을 배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민’이라고 부르면 안되는가. 알바생들에게 갑질을 하지 말라고 알바생들의 등에 “이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입니다”라고 붙이는 캠페인이 있다. 타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할 때 굳이 꼭 ‘가족’ 상징을 활용해야 하는가. 그냥 ‘인간’ ‘인권’ 같은 용어가 사용될 수는 없는가. 요즘 유행하는 ‘4차 산업혁명’ 담론이 발전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키면서 제2의 황우석 사태를 만들지 말란 법도 없다.

 지금의 87년체제를 계승하고자 하는 정치세력이 앞으로도 보수가 아닌 진보로 계속 표상된다면,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이미지를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얻은 정권인데’라는 피해자적 심정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모조리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할는지 모른다. 적어도 기존 보수세력이 약화되고 나면, 기존 진보세력이 보수가 되고, 이후에는 이들이 다양한 비판 하에서 발전하고 새로운 진보세력들(진보정치)의 공간이 열려야 할 것이다.

 물론 파리코뮌(1871년)에서의 노동자세력에 대한 처절한 배제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의 19세기 내내 대접전에서 공화파가 승리하는 데는 무려 80년 이상이 걸렸다. 한국도 이제 공화파의 승리라는 역사적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왕정으로 후퇴할 것인가. 하지만 공화파가 승리하더라도, 여성들과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과 소수자들과 외국인들을 배제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보수와 진보 세력구도가 전환될 경우, 우리에게 주어질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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