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7.9.14 목 16:45
기획
[특집] 평범한 다수가 불행해지지 않는 사회로 가는 길
정석영 편집위원  |  yae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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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승인 2017.09.05  18: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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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노동 - 행복을 향한 평범한 다수의 길]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회·정치적으로 ‘노동’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갔다. 지난 정권들이 노동을 근로의 개념으로, 고용과 피고용의 상하관계의 한 부분으로 격하시킨 것과 다른 움직임이다. 노동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 본 지면은 노동자로서의 우리들이 고민할 수 있는 주체적 삶과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평범한 다수가 불행해지지 않는 사회로 가는 길

 

이주환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십여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니, 새벽 두 시쯤이니 크리스마스 당일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작은 월간지의 수습 딱지를 떼지 못한 편집자 겸 기자였던 나는 배불뚝이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손때가 배인 자판을 힘겹게 두들기고 있었다. 속으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되뇌며, 이러저러한 송년회에 이끌려 다니다 미뤄진 마감을 초조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등 뒤의 선임을 심안(心眼)으로 꼬나보며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하나’를 소리 없이 외쳤다. 일주일쯤 뒤 ‘인간의 개고생을 다 해’ 만들어진 물건이 내 손에 쥐어졌다. 신국판 크기의 미색 모조지 160여 쪽짜리 묶음들. 그 안에는 내가 창조한 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의 살아온 이야기, 친자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는 자본가단체와 일부 대학교의 유착 관계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성들여 닦아내고 다듬은, 여러 사회운동가들의 귀한 목소리들이 담겨 있었다. 뿌듯했다. 아름다웠다. ‘사회를 바꾸는 저임금 편집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그렇게 실현되는 것 같았다.

  5년 정도가 지난 후였을 것이다. 편집 담당 선임이 된 나는 눈치를 볼 일이 없어졌다. 일이 귀찮아지면 그대로 마감을 미뤘다. 미루고 미루다 한계에 다다르면, 1.5리터짜리 맥주 피처를 모니터 옆에 두고 야근을 했다. 알코올 의존이 먼저인지 일하기 싫어진 게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술이 없으면 밤에 일을 할 수 없었다. 어느 틈엔가 월간지에서 내가 쓰는 글이 없어졌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글을 편집하고, 인터뷰와 토론회 등을 전사하여 정리하는 일 등은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아름답거나 뿌듯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오물통에 손을 넣어 뒤섞고 있는 것 같았다. 우울했다. 물론, 겉으로는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변했고, 우리의 노동현장이 변했고, 한국사회 정치와 사회 전체가 변했다. 가족의 기대도 변했다. 몇 개월 뒤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노동과 행복’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시작했을 때 가장 처음 떠오른 장면들이다.


인재대국에서 노동 존중 사회로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주관적 기쁨과 만족을 의미한다. 노동은 사용자의 지휘와 명령을 받으며 일정한 대가를 받고 규범의 보호 속에서 수행하는 행위를 칭한다. 나와는 다른 욕구를 가진 타인의 지휘와 명령을 받으며 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노동’이란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 아닐까? 그러나 변화무쌍한 실재는 언제나 굳어 있는 개념들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인간은 놀랍도록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통한 개인의 행복 실현은 가능하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내가 나의 노동의 사용자가 되는 것이다. 혹은 나의 욕구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욕구를 가진 사용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둘째, 사용자가 제공하는 대가 혹은 사용자가 제시하는 목적에 맞춰 내 삶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알다시피 둘 다 실현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잘 나서야 하거나, 정말 잘 참아내야 하거나, 아무튼 둘 중 하나는 잘해야 한다.

   
 

  이전의 두 정부는 “인재대국”과 “창조경제”를 부르짖었다. 지금 문재인정부는 “노동 존중 사회”를 천명했다. 둘 사이 차이는 명확하다. 이를테면 인재대국과 창조경제는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창조적인 인재’들을 상대적으로 우대하는 사회다. 노동 존중 사회란 창조적인 인재가 아닌, 그렇게 잘나지 않은 노동자들도 높이 여겨지고 중요하게 대우받는 사회다. 노동 존중 사회를 내거는 것은, 스스로 자기 노동의 사용자가 되지 못한, 혹은 나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노동자들도 그저 인내하고 순종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용자의 지휘와 명령을 얼마나 잘 따랐는지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노동으로 한정되지 않는 당신의 다양한 생활과 이를 둘러싼 살아 있는 관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 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곱씹어보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말 고마운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오래 일하고 따라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 노동자가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한국사회의 상식에 비춰보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상식은 원래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은 구조적 전환이 이미 시작했다. 노동 존중 사회를 내걸었다는 것은 몇몇 ‘천재들의 창조적 파괴 역량’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전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주목한다는 선언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에서 추진됐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 문재인정부는 지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법정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주요 노동정책으로서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자는 같은 장소에서 거의 매일 얼굴 보면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후자는 이른바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들도 기본적인 품위를 지키면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이야기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므로 서로 협력하고 보듬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깔린 정책 방침들이다. 또한,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인 노동력은 실제 노동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거래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과 생활을 가능케 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기본 규범을 전체 사회에 적용하려는 시도다. 개인 수준에서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라, 모두 함께 존엄해지기 위해 체계를 바꾸는 실천이다.
 

모두가 행복한 노동을 위해
 

  체감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규범의 적용을 요구하는 구조적 전환은 그로 인한 리스크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감당해야 할 일부 개인들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불안에 잠식당한 어린 영혼들은 분노하며 외친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 저들은 나만큼 참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채용시험이라는 좁은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으므로 정규직처럼 안정적인 고용을 누릴 자격이 없다. 고용 불안정은 당연한 대가다. 또한 예컨대 아이들을 위해 음식 만들고 배식하는 것과 같은 ‘비천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만 된다. 임금수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적 구분을 나타내는 징표이므로, 비정규직들이 받는 임금은 정규직과 비슷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공평’한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아니라, 시험이 결정해주는 ‘신분서열에 따른 차등대우’가 더 중요한 규범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증적인 주장들의 분출은, 역설적으로 노동 존중 사회로 가기 위해서 바꿔내야 할 비합리적 상식들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무엇이 정의로운 노동인가, 혹은 어떤 노동자의 행복이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둘러싼 해석 투쟁 역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다. 노동의 목적과 삶의 목적이 통합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몰입과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내가 실패한 것처럼, 모든 개인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달리해야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사회는 노동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문재인정부는 ‘존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평범한 다수의 생활조건과 권리를 창조적 소수의 역량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다루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종속된 노동’이 ‘자유로운 삶’만큼 존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규범으로 규율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 존중 사회라는 구호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규범의 전환을 요구하는 주장이다. 현 정부가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치켜뜨고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당신은 ‘노동 존중 사회’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왔을 당신까지도 아프게 하는 이 구조적 변화에 동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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