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순 / <레디앙> 기획위원

[국제] 2017 세계체제 지형도

2017년은 세계 선거의 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독일은 물론 대한민국의 대선까지 있다. 그리고 국제 관계는 새롭게 당선될 각국 수뇌부의 기조나 각국의 국민들의 선택에 따라 급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국제’면 기획을 통해 미국‧유럽‧한국 등의 선거를 다루고자 한다. 각국의 선거를 통해 세계체제는 어떻게 재편 될 것인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트럼프와 미국 헤게모니 ② 프랑스 대선과 유럽연합의 위기 ③ 독일 총선과 유럽연합의 향방 ④ 한국 대선과 우리의 과제

대선과제,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

최백순 / <레디앙> 기획위원

  1천6백만 개의 촛불로 타오른 장미대선은 문재인 정부의 탄생으로 막을 내렸다. 광장의 촛불은 박근혜의 탄핵과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주말마다 광화문을 지켰다. 탄핵과 함께 9년 만에 정권은 교체되었다. 이제 촛불의 호명에 응답해야할 남은 과제는 적폐청산이다. 대선기간 동안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87년 이후 바로 잡지 못한 것들”을 강조했다.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의미하는 적폐청산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 4층에 위치한 CIP 라운지에는 낯선 현수막이 내걸렸다. 조그마한 테이블과 간이의자에 자리 잡은 문재인 대통령 뒤로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시대’가 큼지막하게 눈에 띄었다. 대통령과 공항공사 비정규직노동자들과의 대화의 자리에서 공사사장은 “비정규노동자들은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를 위해 ‘좋은 일자리 창출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고 사장이 직접 팀장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공사의 용역업체 비정규노동자의 규모는 6천8백여 명이다. 곧 개장될 제2터미널의 비정규직 채용 예정 규모는 3천여 명이다. 공항의 80%에 이르는 1만여 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이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논의가 전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공항공사는 용역업체에 소속된 비정규노동자들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는 입장을 10년 동안 고수해왔다. 한 노동자의 표현처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과(過)를 문재인 대통령이 바로 잡는 것은 당연하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출발은 ‘노동’에서부터

  5월 27일,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자부)는 산하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5개의 발전자회사, 강원랜드 등이 그 대상이다. 무려 3만여 명에 이르는 규모다. 한국공항공사에 이어 산자부가 이런 전격적인 결정을 단행한 것은 모두 문재인 정부가 설치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공약으로 내세운 좋은 일자리 창출에서 공공기관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규직 전환방안을 자율에 맡긴 것과 자회사 설치 등을 통해 추진하겠다는 것은 노사협상과정에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집권 초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강력한 일자리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자, 지난 9년 동안 정규직전환은커녕 지속적으로 비정규직 확대를 통해 이익창출에 매몰되었던 재벌들의 태도가 급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항공사를 방문한 며칠 후, SK브로드밴드는 협력업체 비정규노동자들을 자회사를 설립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상 인원은 5천2백 명으로, 2015년 SK텔레콤이 자회사 설립방식으로 8천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이후 두 번째 규모다. 최근에는 그동안 가장 소극적이었던 LG유플러스도 2천5백 명 규모의 정규직전환을 확정했다. 양대 통신사의 결정에 따라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KT도 외면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지난 30년 동안 계속해서 후퇴했던 대표적인 적폐는 7백만 명을 눈앞에 둔 비정규직 문제다.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DP)의 1/3에 해당하는 550조를 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재벌들이 납부하는 법인세율은 22%지만 그동안 정부의 각종 제도적 지원을 통해 실제로 납부하는 실효세율은 절반 수준까지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경기침체만을 강조하며 투자는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만 확대하면서 늘린 이익은 곳간에 쌓아두고 있다.

  2014년 현대자동차그룹은 입찰을 통해 강남구에 위치한 한전 부지를 무려 10조 5천억에 사들였다. 천문학적인 이 금액의 출처는 곳간에 쌓아두었던 유보금이다. 유사시 투자에 사용되어야 할 돈이 부동산을 매입하는데 사용된 것이다. 매입한 부동산에는 그룹의 통합사옥을 건설할 예정이다. 통합사옥의 건설이 장기적으로 그룹의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지만, 세제혜택과 비정규직의 땀에서 나온 돈이라는 사실로 볼 때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복지’로의 연착륙

  우리 경제는 이미 정부가 각종 처방을 극단적으로 도입해도 2% 미만의 경제성장이 반복되고 있고, 투자예산에 비교해보면 거의 무의미한 성장에 가깝다. 게다가 OECD 국가들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율 발표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제로성장 시대를 대비할 때다. 따라서 근본처방은 아닐지라도 기본적인 처방으로 ‘소득주도’를 적극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국민들의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고 가처분소득도 줄어들고 있다. 국민들이 유리지갑을 열어야 재래시장도 살고 자영업도 산다. 돈이 돌아야 성장과 무관하게 국민경제가 기본적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정부가 기업을 우선으로 지원해 성장이라는 과실이 커져야 국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효과’는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조차 효과가 없다고 손을 뗀 낡은 경제정책에 불과하다.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가 줄어든 가계지출이 조금씩 늘어나야 동네시장과 골목상권이 살아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기관과 통신사에서 시작되고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정규직전환이 중요한 시발점이다.

  비정규노동자의 정규직전환은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죽음의 다른 이름인 ‘안전 불감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공장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는 줄어들지 않고 있고 건설현장 안전사고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사망사고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정규노동자들이다.

  대선 이후 우리에게 놓인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 해결의 출발점은 노동에서 찾아야 하고, 당연히 비정규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흔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주장하는 전통의제가 우리사회의 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주택·교육·에너지(녹색)·복지가 그것이다.

  평생소원이 ‘내 집 마련’인 것은 얼마나 비참한 소극(笑劇)인가. 대학을 나서면서 학자금 대출로 빚을 안고 프라하 성의 황금소로보다 더 좁은 취업의 길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은 누구의 책임인가. 핵발전소 폐기는 세계적인 흐름이고 재생 가능 에너지는 이제 시대적 소명이다. 소득 1만 불 시대에 복지가 자리 잡은 유럽과 달리 3만 불 시대를 앞두고도 복지는 사치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적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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