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성 /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원우문학 - 창작 소설]
 

사과의 맛(2)

윤은성 /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저 언니는 자꾸 가게에 와서 오랫동안 안 나가는구나.

  팬시점의 주인이 어린 딸을 안고서 중얼거렸다. 학원을 그만둔 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주인이 나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물건을 훔치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볼펜을 하나 집고 유리 계산대 위에 동전을 디밀었다. 나오는 길에 볼펜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던 것 같다. 손이 땀 때문에 미끈거렸던 것 같다. 볼펜을 차도 위에 떨어뜨렸던 것 같다. 신호등이 바뀌고, 차가 오고, 볼펜이 부서졌던 것 같다. 집까지 걸어갔던 것 같다. 기다란 저녁이. 나를 스치고 지나쳤던 것 같다. 나는 긴 머리의 어머니를,
  무표정한 얼굴의 어머니를 생각했던 것 같다.

  주방의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낸다. 싱크대에서 수돗물을 틀어 사과를 헹구기 시작한다. 흐르는 물. 차가운 물. 쏟아지는 물. 끼얹어지는 물. 물이 걷는다. 물이 뛰어내린다. 물이 주저앉는다. 물이 넘어진다. 배수관을 따라서 쓸려가는 물. 물은 배수관을 터트리지 못한다. 울다 지친 사람 같다. 약한 수압. 수압이 약합니다. 네. 물이 잘 안 나온다고요. 네. 싱크대도 그렇고요. 세면기도 그렇고요. 아니요, 수도꼭지 문제는 아닐까 싶거든요. 잠가도 흐르고 틀어도 흘러요. 네. 네. 고쳐줄 수 없다고요. 고쳐지지 않는다고요. 고쳐보기는 한 건가요. 그렇군요. 네. 네.
  그밖에 필요한 것 있으면 전화 주세요.
  그밖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과를 자른다. 과도의 날. 과도의 굳기. 과거의 과도와 미래의 과도. 과도에게 ‘현재’가 ‘몰입’의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몰입’에서 벗어나 날뛰는 망아지. 그런 것은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비유다. 한 조각을 집어 씨앗을 도려내고 베어 먹기 시작한다. 시큼하기만 할 뿐 단맛이 없다. 발육이 덜 된 사과일까. 장마철에 물기를 너무 많이 머금은 걸까. 혹은 개체 수를 제대로 조절하지 않은 탓에 너무 많이 달린 열매들에게 고루 양분이 가지 않은 걸까. 혹은 사과나무의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서 이 열매는 빛을 제대로 쪼이지 못했던 것일까. 과도는 언제나 그 끝이 내 몸에서 바깥쪽으로만 놓인다.
나는 과도 날의 끝부분이 내 쪽으로 향하도록
  과도를 돌려 놓아본다.

  오후의 빈 교실에 있었던 것 같다. 나와 수현은 당번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키 차이가 많이 나서 번호가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번을 같이할 수는 없었다. 수현이 당번 순서를 바꾸었던 것 같다. 수현은 나와 함께 쓰레기통을 비우고 교실의 창문을 잠갔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찾아오고 있었던 것 같다. 막 밀폐된 교실 안에서 그 애는 갑자기 울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할 말이 있어. 그 애는 우느라 잠깐 뜸을 들였지만 마음먹었다는 듯이 곧장 다음 말을 쏟았다. 배가 점점 불러와.

  붉지 않은 사과. 붉지 않은 마음. 조금 뻔뻔하게 살아라.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나보다 좀 뻔뻔하게 살아라. 어머니는 무릎을 모으고서 벽에 기대어 앉길 좋아했다. 어머니의 발목에서 어머니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던 개미. 어머니의 무릎에서 어머니의 팔을 타고 기어 올라가던 개미. 어머니는 자신의 흰 목 위에서 배회하던 개미를 엄지와 검지로 꾹 집어 죽였고.
일정한 간격으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커튼과 커튼. 커튼을 타고 흘러내리는 벽.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가 벽의 눈꺼풀. 거기가 벽의 펼친 손가락 틈. 낮과 밤. 낮과 밤. 종점과 궤도. 끝과 끝과 끝과 끝. 종점과 궤도. 이를테면 사과를 관통하는 화살과 얼음으로 덮인 땅을 가로지르는 철도. 수면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와 떨어지는 물고기. 고쳐지지 않는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양 손바닥을 모아서 물방울을 받는다.
  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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