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민 / 서울대 강사, <문화/과학> 편집위원

  공적 영역의 사적 남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지금. 서구 문명의 발달사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끝없는 긴장과 투쟁의 기록으로 바라봤을 때,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무엇이었고 그것들이 도모한 공공성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본 지면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공공성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공공성의 기원과 역사 ② 좌절된 공론장, 산업화 ③ 고여 있는 공공성, 민주화 ④ 정치 너머의 정치, 네트워크


분산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치적인 것’의 회복


김상민 / 서울대 강사, <문화/과학> 편집위원

  ‘87년 민주화 운동’이 30주년 되는 올해, 우리 사회는 당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적 열망과 노동해방의 염원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변혁에의 의지를 명예롭게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적 과제들을 여러 겹 덧붙여 내면서, 그만큼 의미 있는 정치적 돌파를 해냈다. 박근혜 탄핵과 국정 농단 세력의 처벌은 주권자로서의 시민들이 촛불 광장에서 일구어낸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적과도 같은 사건들의 연쇄가 낳은 고귀한 시민 정치혁명의 경험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다시금 그들의 삶에서 정치라는 것의 본연, 혹은 통치와 제도로서의 ‘정치(la politique)’가 아니라 그야말로 경험과 실천으로서의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2008년 초 국내에 번역 출판된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다중(조정환 외 옮김, 세종서적)》은 그해 5월 시작된 소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지속되는 내내, 그리고 그 이후까지 학계와 시민운동 정치 세력 내의 촛불 집회 주체와 관련한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읽혔다. 당시의 집회는 노동·민족·민중과 같은 대의를 앞세우지 않고 유모차에 앉은 어린아이부터 여중고생, 주부와 노인, 네티즌과 예비군에 이르기까지 전혀 일관성 없는 다양한 주체들이 누구의 명령이나 지도를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정형화되지 않은 시민적 저항이었다. 그처럼 전에 없던 저항 주체들을 가리키는 데에는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이, 그리고 저항의 형태와 방식을 묘사하는 데에는 ‘분산된 네트워크’라는 해석이 매우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요컨대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하는 ‘민중’과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체성에서의 차이가 제거되지 않은 “특이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135쪽).” 그러나 다중은 그 차이나는 특이성들에도 불구하고 균열되거나 파편화되기보다는 오히려 “공통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136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중’에 의한 ‘정치적인 것’의 회복


  이번의 탄핵 국면에서 드러난 촛불 시민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다중’의 모습과 ‘분산적 네트워크’ 형태의 저항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9년 전보다 훨씬 더 진일보해, 절제된 동시에 자신감 있게 다양체를 안아내고 이끌고 확산시켜 나갔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수십 혹은 수백의 크고 작은 복수의 단체와 조직들이 중심 아닌 중심을 구성하면서 각각의 특성과 역량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 정치를 압박하고 광장의 정치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떠한 대표성이나 지분을 요청하지 않고(오히려 그 중심 자체는 스스로 물러서 사라짐으로써 하나의 소실점으로 중심의 위치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떠한 소수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들의 목소리도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은 아마도 시민의식의 성숙이나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1987년과 2008년을 거쳐 축적해온 광장 정치의 경험이 일구어낸 성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사회가 구축해낸 민주주의나 시민의 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애초 정당과 국회는 박근혜의 퇴진이나 탄핵에 대해 긍정적으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우겨볼 심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누구도 앞장서서 탄핵과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득이 될 싸움일지 독이 될 싸움일지 정치공학적 주판알을 튕기기에 바빴다. 이 국민의 대표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대통령에 대한 강한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게 만든 것은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 시민들의 명령이었다. 위임된 권력에게 법률상 부여된 역할을 곧장 수행할 것을 주권자 시민들이 직접 명령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본연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 주권자로서의 시민은 다중의 모습으로 민주주의가 또한 그렇듯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 거대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힘의 행사자로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고 복원해야 하는 동시에 수많은 다수의 작은 주체들의 특이성들이 이루는 통약 불가능한 욕망을 실현해야 한다. 위로는 단일하고 거대한 주권 권력을 행사하고, 아래로는 아주 세밀하게 차이 나는 신체들을 가로질러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촛불에 주어져 있었다.
 

환원되지 않는 것들의 네트워크
 

  청소년들이 촛불 집회에서 독자적인 시국 대회를 열고 가두행진 선두에서 (지금의 기성세대가 망가뜨려 놓은 정치 자체를 바꾸어 낼) 광장 정치의 당사자임을 목소리 높일 때, 성 소수자들의 무지개 깃발과 페미니스트들의 보라색 깃발이 여기저기에서 당당히 휘날릴 때, 촛불 권력은 더욱 촘촘해지고 강력해졌다.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정체불명의 패러디 깃발들을 들고 나온 사람들, 혼자 참여한 사람들끼리의 모임, 탄핵이라는 정치적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였던,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욱더 정치적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던 페미니스트와 성 소수자들,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들, 그들은 어떤 공동체에 포함되었다기보다는 집회를 통해 자신들의 소속과 네트워크를 발명해냈다. 거대 노동조합과 단체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촛불의 힘이 그만큼 약했겠지만, 이들 소수 그리고 약한 권력 주체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촛불은 그 자체의 무게로 인해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 속으로 저절로 내려앉고 말았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다중’은 구성 주체의 다양성과 특이성들에 대한 긍정을 통해 더욱더 강력하고 유연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셈이다.

  상호 이질적인 주체들을 연결하고 가로지르는 분산적 네트워크가 생성과 이를 통한 시민 권력의 발산은 정치를 넘어선 정치, 즉 정치적인 것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다. 여기서 네트워크는 스마트폰과 SNS와 같은, 연결을 위한 테크놀로지를 넘어 하나의 대표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차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표현되는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조직의 방식으로서의 네트워크를 포함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연결(connection)과 연합(association)의 네트워크가 매우 밀접하게 서로를 침범하면서 구분 불가능한 지점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시민적 정치의 동역학을 구현하고 있는 서로 다른 양상으로서 이 두 가지 네트워크의 형상은 기실 하나의 네트워크 정치를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촛불 시민 혁명은 본격적인 네트워크 정치로 들어가는 첫 시도로 기억될 것이다. 국회의원들에 대한 시민들의 문자메시지 세례를 필두로 시민 행동과 적폐세력의 과오를 디지털 기록으로 남기는 일, 탄핵 촉구 청원을 위한 웹사이트들, 페이스북 페이지들과 트위터 해시태그 등, 시민의 느슨히 조직된 정치 행동은 기술적 네트워크와 쉽사리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촛불 이후 다중의 정치 현실에 던져진 과제가 있다면 시민 공통체(commonwealth)를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 지속적인 합의와 협상, 그리고 협치(governance)를 가능하게 할 장치들(dispositifs), 즉 정치 행동의 기술적 네트워크를 발명해내는 것이라고 본다. 모든 활동이 모바일로 가능한 시대에 지금의 낡은 정치의 방식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장치, 예를 들면 온라인 정치 플랫폼과 결합한 온라인 정당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장치의 발명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주체화 과정을 지속 재생산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술 네트워크를 통해 자발적으로 전유되는 주체들의 삶-정치적 가치들, 즉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놓는 작업이 될 것이다.

  촛불을 통한 시민의 정치 회복은 지속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위임된 권력과 자본의 욕망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다음의 촛불이 또 다시 승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중으로서의 시민은 그 역사적 과정의 경험을 계승하기도, 망각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매번 다른 방식의 연결과 연합의 네트워크를 통해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복원하고 그것을 시민의 ‘공통체’ 속에서 발현시켜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통제로서의 정치를 뒤집어 다시금 자본과 권력을 다중의 통제 아래 재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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