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신 / 유럽문화학부 교수

[교수칼럼]

나는 터치한다, 고로 존재한다!

류신 / 유럽문화학부 교수

  손에 쥔 스마트폰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구가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무한을 붙들고/ 시간 속에 영원을 붙잡아라.(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그렇다. 우리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서 세상을 판독하고 인공낙원을 본다. 시공간의 경계를 가뭇없이 허물며 나와 세계를 종횡무진 네트워킹하는 스마트폰은 손바닥으로 들어온 무한의 세계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과 행동방식을 바꾸고 (무)의식을 재편한지 오래다.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스마트폰은 산만과 집중의 통섭을 실현한다. 우선 이 녀석은 심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총천연색 볼거리가 눈길을 붙잡고 고음질의 디지털 사운드가 귀청을 울린다. 온갖 정보가 쇄도하고 스팸 메일이 기습한다. 카톡은 재잘거리고 트위터는 지저귄다. 정보의 포식으로 눈과 귀는 피곤하고 손은 분주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예언대로 인간은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이 됐다. 동시에 스마트폰은 순간 집중력을 훈육한다.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수업 시간에 새끼손톱보다 작은 자판을 정확하고 집요하게 두드리는 고도의 주의력을 보라. 산만한 집중! 이 모순적 정신상태가 디지털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둘째, 스마트폰은 소통을 촉진하면서 소통을 방해한다. 스마트폰의 장점은 나와 타자를 부단히 연결한다는데 있다. 하지만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와 알림음은 사람과 사람의 면대면 의사소통의 리듬을 무시로 끊는다. 강의실 책상 밑에서 스마트폰 위를 기민하게 유영하는 손가락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 ‘딴전의 장벽’을 쌓는다. 내가 가상의 존재와 대화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는 순간, 내 앞에 엄연히 실존하는 파트너와의 관계는 일시 중단된다. 소통의 과잉이 소통의 정체를 양산하는 꼴이다. 점점이 흩어진 사람들을 광적인 속도로 네트워킹하는 스마트폰이 인간관계의 단절을 낳는 이상한 가역 반응을 우리는 매일매일 체험한다.
  셋째, 스마트폰은 ‘메시지(message)’이자 ‘마사지(massage)’이다. 매체철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옳았다. 이제 스마트폰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메시지 그 자체이다. 스마트폰은 정보의 콘텐츠가 수집, 분석, 저장되는 지각의 연장, 즉 제2의 자아로 승격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마트폰 이용자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의 하비투스를 내면화한다. 스마트폰은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도사인 것이다. 한편 스마트폰은 현대 소비사회의 욕망이 집적된 물신(物神)이다. 연인을 애무하듯 매 순간 스타카토 주법으로 톡톡 쓱쓱!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손보다 스마트폰을 더 자주 ‘마사지’한다. 나는 터치한다, 고로 존재한다(Tactus, ergo sum)! 바야흐로 촉각이 사유에 선행하고 속도가 본질을 규정하는 감각의 제국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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