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성 /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원우문학 - 창작 소설]

 

사과의 맛(1)


윤은성 /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윤병락 作, Green Apple, 109x102cm, oil on koreanpaper, 2010
윤병락 作, Green Apple, 109x102cm, oil on koreanpaper, 2010

  미안해.

  이 말이 내 방안에서 울렸다가 사라진다. 바닥을 쓸다 말고 ‘미안해’라니. 내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인가. 나는 혼자 있고 ‘미안해’ 라고 말했고 이 말은 내 옥탑방에서 한 번 울리고 사라졌다. 창문은 닫혀있고, 오후의 햇빛이 유리를 통과해 들어오고,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온다. 책들은 제자리에 있다. 가스레인지와 식기 건조대와 찬장과 찬장의 손잡이들. 찻잔과 티스푼과 과일칼과 포크들. 나는 내가 청소한 나의 방을 구석구석 살핀다. 아직 닦아내지 못한 먼지와. 아무리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들. 욕실 청소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지문이 잔뜩 묻은, 아무렇게나 짜인 채 절반쯤 사용한 치약과 기다란 머리카락 뭉치들을 치웠을 뿐이다. 욕실 세정제를 사 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싱크대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싱크대는 고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수현이 준 것이었다. 내 등 뒤 가방에서 툭 떨어진 별 인형 마스코트. 내가 그걸 주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애와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친했었나. 간혹 피구 공을 던질 때. 그 애가 무리 중에 끼어있었던 것 같다. 그 애의 멜빵 치마. 뛸 때마다 팔랑거려서 속옷이 보이지나 않을까 나는 속으로 걱정했다. 쓰라리다고 했던 것 같다. 종아리의 맨살이 공에 맞았을 때 살갗이 쓸렸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아이들. 백엽상 주변을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 애 말고도 여러 명의 여자애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같은 학원에 다니던 애들. 백엽상 근처의 견본용 암석들 위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었던 것 같다. 사암과 석회암과 편마암과 화강암. 이런 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풀들이 듬성듬성 웃자라있었다.

  고등학생 오빠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백엽상 밑엔 백골이 묻혀있다고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여자애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무얼 조심하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우리를 상대하다가 저들끼리 오토바이를 타고 금방 다른 데로 가버리곤 했다. 오락실이나 시외의 저수지. 혹은 그보다 더 멀리. 다른 고장과 다른 고장의 시내. 혹은 그보다 더 멀리. 그들이 우리를 상대했었던 건지 확실히 기억이 안 난다. 그들이 상대했던 수현이었던 것 같다. 그 애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졌다. 방과 후 학원버스를 탔을 때였던 것 같다. 그 애는 혼자서 다시 내린 적이 있었고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던 그 애와 그 애의 그림자.

수현은 학교에 자주 빠졌던 것 같다. 수업일수가 모자라기 직전에 그 애는 담임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학교에 나왔던 것 같다. 아이들이 웅성거렸던 것 같다. 그 애는 오빠들 중 한 명과 저수지나 오락실이나 그보다 더 멀리. 다른 도시의 시내에서 돌아다녔다고 했다. 나는 그걸 그 애한테서 직접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로 그 애는 점심을 혼자 먹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 애는 전학을 갔다. 그 애로부터 단 한 번 전화가 왔었지만 그 이후로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애가 수화기 너머로 연락처를 읊어 줬던 것 같다. 그 번호를 되뇌면서 나는 그 번호를 외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낯선 지역 번호였다. 나중에 내 쪽에서 연락해 보려고 했지만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서 단념했던 것 같다.
  쉬운 단념이었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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