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8.9 목 09:40
특집
몰락을 예감하며 현재의 파편을 살피기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안혜숙 편집위원  |  ahs11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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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호]
승인 2017.03.08  22: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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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붕괴와 재건] 왜 ‘파국 담론’인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와 인간, 자연의 몰락을 되짚어 볼 때, 세월호 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대한민국은 위기와 재난이 일상인 시대를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미래를 강탈당한 시대 속에서 ‘파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재를 낯설게 살펴보고, 진정한 ‘시작’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왜 지금 우리는 ‘파국’을 이야기 하는지, 다양한 매체, 학문 등에서 나타난 파국적 감성이 어떤 정치성을 담고 있는지 ‘붕괴와 재건’이라는 특집주제 아래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몰락을 예감하며 현재의 파편을 살피기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파국’이라는 말은 영어 ‘catastrophe’의 번역어로, ‘대재앙, 대참사’를 뜻한다. ‘파국’의 스케일은 갑자기 발생한 불행한 사건을 의미하는 ‘재난’(disaster)보다 크고,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자어 파국을 ‘깨어진(破) 판(局)’으로 새길 때, 이 말은 더 이상의 역전은 기대할 수 없는 절대적 몰락의 이미지를 가진다. 영어 ‘catastrophe’엔 다른 의미가 덧붙어있다. ‘catastro-phe’는 그리스어 ‘katastrephein’에서 유래했는데, 이 그리스어는 ‘뒤집히다(to overturn)’라는 동사다.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힐 때 그것은 세상의 절대적 끝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기존 질서의 ‘역전’ ‘전환’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말이 연극에서 ‘반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 ‘파국’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재의 세계를 이미 ‘깨어진 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질서가 사실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깨뜨리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존 질서’라는 것은 무엇일까? 서양 근대의 시작 이후 생겨나 20세기 중반에는 전 세계의 가치체계가 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후쿠야마의 표현에 따르면 이 둘은 자유주의의 두 형태로,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민주주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근대라는 시대를 창조했고, 그 속에서 인류의 삶을 개선시켰지만, 그 효력은 다한 듯 보인다.

 

   
 

 

                                  자본주의의 무한 질주와 민주주의의 무기력


  자본주의는 인류의 생산력을 급진적으로 끌어올리면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를 이룩한 동력이다. 생산과 소비, 기술개발, 그리고 이윤축적과 기업확장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사이클은 끊임이 없다. 자본의 운동은 쉴 새 없이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끝없이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사이클이 지구 전체의 삶을 끝장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말하는 ‘생산’이라는 것이 사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자원의 소비’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지구를 소비해야만 지속될 수 있다. 맑스가 예측했던 자본주의는 세계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는데, 그 과정에서 전 세계의 자원을 모조리 소비해왔다. 15세기 말에 ‘신세계’를 발견하면서 자원과 노동의 활용 가능성이 극적으로 확장됐으나, 이제 자본주의가 쓸 수 있는 ‘신세계’는 더 이상 없다. 무엇보다 산업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석유 에너지가 한계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원 고갈은 환경 변화를 가져오고, 환경 변화는 기후 변화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아지면서 대기의 순환이 원활해지지 않고, 대기 온난화로 인해 남북극의 빙하가 녹는다. 이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상기온 현상이 발생한다. 쓰나미, 홍수, 미세먼지 등은 여기서 발생하는 재난이다. 이 재난은 다시, 자본주의가 이룩한 세계화된 문명을 위협한다. 몇 년 전 겪은 후쿠시마의 지진, 쓰나미, 원전 폭발은 이 연쇄적 재난이 어떻게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본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해, 파괴적인 자본의 운동을 더욱 급진화시켰다.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은 더욱 심해졌고, 사회적 갈등도 심화됐다. 인간의 본성 역시 더욱 파괴되었다.


  민주주의는 끝 모르고 달려가는 자본주의를 제어할 정치 시스템이지만, 자본주의의 힘 앞에 굴복해버렸거나 흡수돼버린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경제가 일상을 먹고사니즘에 종속시킬 때, 대중의 민주주의적 에너지는 고갈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 민주주의적 사회 장치들은 ‘액체처럼 녹아 흘렀고(바우만)’, 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생존하는 것만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게 된다. 투표와 선거는 쇼비즈니스가 되었고, 관료와 정치인은 자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법과 제도와 경찰력을 자본의 운동을 지키는 데 사용한다. 토크빌이 예언했듯 대중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파편화된 개인을 만들어내고, 이 개인들은 ‘최후의 인간’이 되어 자기의 생존과 안락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자본의 지배력이 정치를 압도하고 모든 것이 ‘경제법칙’의 통제를 받게 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이름만 남게 된다. 대학이 사업체가 되고, 대학에서 인문학이 홀대받거나 제거되는 현상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모두가 경제인이 되어야 할 때, 경제와 생존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비판적인 인문학 사유는 몇몇 프로그램화된 ‘대중 교양’만을 남겨놓고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한다.

 

   
 

몰락이지만 동시에 역전인 ‘파국’


  자본주의의 무한 질주와 민주주의의 무기력이 결합될 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상이 탄생한다. 제이슨 W. 무어는 자본주의 500년이 만든 세계를 ‘자본-세계생태(capitalist-world ecology)’라고 부르면서, 인류의 생태는 결코 자본주의와 함께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환경오염이나 자원고갈만이 인류 생태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 본성 자체의 변화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더 이상 신세계를 찾을 수 없는 자본이 인간의 내면(인지, 지식, 감정)으로 들어와서 이를 교란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인지 활동을 24시간 끊임없이 요구하는 노동과 삶 속에서 인간이 보이는 대표적 상태는 ‘소진’이라는 것이다. 자극의 과잉에 의해 소진된 인간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과격한 폭력을 일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과 폭력이 결합한 대표적 사례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 폭력이다. 《죽음의 스펙터클(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지음, 솜섬별 옮김, 반비, 2016)》에서 베라르디는 소진된 인간들의 소외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으로 한국을 들고 있다. “일상의 사막화, 리듬의 과잉가속, 생애의 극단적 개인화, 노동시장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경쟁, 불안정성의 확산”은 한국을 “가장 진화한 수준의 동시대적 니힐리즘”이 펼쳐지는 “세계의 그라운드 제로이자 지구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이 강력한 힘 속에서 한국인들은 대개 서바이벌 게임에 나선 이들처럼 무한히 질주하지만, 동시에 그 게임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의 수도 급증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스스로를 ‘잉여’나 ‘폐인’으로 규정하며 피시방을 전전하던 이들은 적극적인 폭력을 요청하며 진화하고 있다. 엄기호의 책 제목처럼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고 외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질 게 뻔한 게임을 ‘리셋’하여 새로 시작하듯이, 이제 사람들은 세상 자체를 ‘리셋’하고 싶어 한다. ‘나도 망했으니 차라리 모두 다 망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의 세 형태 중 가장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다. 일베의 부흥과 IS 가입, 고등학생의 도시락 폭탄 투척, 여성과 노인과 이웃에 대한 무차별 폭력 사건 등은 이 리셋 욕망의 전면화를 알리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


  ‘파국 담론’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두 축이 망가짐으로써 ‘깨어진 판’으로 변해가는 우리의 현재를 직시하려는 모든 담론을 뜻한다. 가령 최근 들어 점점 많아지는 포스트-아포칼립스 문학은 우리의 현재적 상황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여 추론함으로써 문명의 종말 이후 인간의 삶을 상상한다. 이것은 단지 문학적 즐거움을 위한 상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철학적인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문학에서 그려지는 종말 이후 인간의 삶 속에는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찾기 힘들다.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가 되거나,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노예가 되거나, 생존을 위해 홀로 끝없이 길을 걷는다.


  간혹 휴머니즘적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의 모습이 상상되기도 한다. 이 모든 문학적 경험을 통해 독자는 궁극적으로 현재의 지배적 질서를 낯설게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진보 패러다임을 진리로 여기면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파국 담론은, 김홍중이 《사회학적 파상력(문학동네, 2016)》에서 말하듯이, 진보를 꿈꾸기 전에 그 꿈이 깨어진 곳을 바라보라고 권한다.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가 미래로 떠밀려가면서도 현재의 파편들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처럼, 파국 담론은 현재의 진보보다 현재의 ‘파편’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파국이 몰락이지만 동시에 역전이기도 하다면, 오늘의 질서를 역전시키는 힘은 아무 일 없이 잘 될 것 같은 현재 속에서 몰락을 예감하고 그 파편을 살피려는 태도에서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파국을 사유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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