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영역의 사적 남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지금. 서구 문명의 발달사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끝없는 긴장과 투쟁의 기록으로 바라봤을 때,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무엇이었고 그것들이 도모한 공공성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본 지면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공공성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공공성의 기원과 역사 ② 좌절된 공론장, 산업화 ③ 고여 있는 공공성, 민주화 ④ 정치 너머의 정치, 네트워크
 
역사 속 공공성의 계보
 
하승우 / 녹색당 공동정책위원, 《공공성》 저자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대국민담화에서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국에서 부패와 연루된 공직자들은 항상 국익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우겨왔다. 그들은 개인의 이해관계와 국익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반면에 평범한 시민들은 행정기관에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개인의 의견이나 사적인 이해관계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받곤 한다.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는 기준이 권력의 유무일까? 영화 <판도라(박정우, 2016)>를 보면 핵발전소 사고 직후 국무총리가 혼란사태의 야기를 염두 해 언론을 통제하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백만 명의 목숨과 건강이 달린 일인데 정부는 사안을 해결하지 않고 덮으려고만 한다. 세월호 참사와 겹치는 장면이다.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시민의 통제를 벗어나면 누가 공공성을 확보할까.
 
공공성, 함께(共) 공적인 일(公)을 결정하는 것 

  공공성의 어원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로 공화국(republic)의 어원과 같고 ‘공적인 것 또는 공적인 일’을 가리킨다. 푸블리카라는 말은 사사로운 일이나 집안일을 의미하는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의 반대말로, 프리바투스(privatus)는 타자의 시선에서 배제되고 박탈된 삶을 뜻했고 푸블리카는 공동체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나 활동을 뜻했다. 그런데 이 푸블리카라는 말은 인민을 뜻하는 포풀루스(populus)와도 어원이 같고, 로마공화국은 ‘인민의 것(res populi)’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푸블리카와 포풀루스를 합치면 공공성은 인민이 모여 공적인 일, 공동체의 일을 함께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공공성은 공(公, public)과공(共, common)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공화국의 시대를 지나 근대 자유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공적인 사안에 관한 결정은 국가의 전유물이 되었고,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私)의 생명과 자유, 소유권을 지키는 역할을 자임하며 개인을 사적 영역으로 밀어냈다.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공공성은 정부와 정치인의 권한이 되었고 ‘함께’의 의미가 사라졌다. 권력이나 많은 재산을 가진 이들의 사적인 판단이 공적인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도, 마치 그런 영향력이 없는 듯이 은폐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타자의 시선에서 배제되지 않고 드러나는 삶의 중요성이 사라졌고 정치가 축소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한참 후에나 등장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등장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정부와 자본주의에 맞서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진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방된 사회를 만들려 했다. 소비에트의 이상은 공화국의 이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주의에서도 노동계급이나 민중이 공공성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평가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공(公)의 의미는 부각되었으나 여전히 공(共)의 의미는 부각되지 못했다.
  공공성에서 ‘함께’의 중요성은 동양의 공공성을 고려할 때도 중요하다. 서양과 달리 동양은 중세 이전부터 국가의 공적 영역을 규정짓고 확장했으며, 일찌감치 행정체계를 구성하고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왕은 치수(治水)나 대규모 공공정책을 통해 백성의 삶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에 이미 대비원과 제위보, 혜민국이 만들어져 각 지방에도 의사가 파견되었고 가난한 사람이나 일반 백성들을 치료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에 활인원과 활인서가 생겨 병을 치료하고 약품과 옷, 먹을거리 등을 제공했다. 동양에서는 공공성이 천리(天理)나 천하동리(天下同利), 위민(爲民)과 같은 개념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함께’의 의미는 비어 있었다. ‘여민(與民)’이나 ‘대동(大同)’같은 말도 있었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적 공공성 : 위로부터의 공공성, 사유화된 공공성
 
  특히 한국에서 공공성 논의는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를 도입한 개화기 지식인들이나 <독립신문>은 특정한 자격을 갖춰야만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봤고, 민중을 문명의 기준에 맞게 계몽시키려고 ‘신체예절’을 강요했다. 민중은 여전히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이었고, 일제 식민지는 위로부터의 근대화와 발전을 폭력으로 강요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공공성 개념은 민중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정부의 일방적인 기획과 집행을 정당화시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즉 민(民)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의 삶을 짓밟는 행위가 정당화되었고, 멸사봉공처럼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공공성인 양 강요되었다.
  공공성과 관련해 일제 식민지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당시에는 사유와 국유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유(共有)들이 있었다. 식민지 시기의 공유 개념은 마을과 문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서구식의 공사 개념으로는 재단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일제가 토지조사를 내세워 사적 소유권을 강요하고 동계(洞契)의 자산을 면의 자산으로 이전하면서 공유지는 점점 사라졌다. 함께 살 수 있는 삶의 기반들이 사라지고 점점 사유화되거나 국유화되면서 공동의 문화도 사라지고 공공성도 훼손되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공성은 정부의 결정에 따르든 반대하든 입장과 상관없이 사적인 개인의 자리를 지우거나 민중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어 왔고, 공통의 기반이나 문화 없이 가치나 이념으로만 논의되곤 했다. 특히 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사업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나 종북으로 몰리는 사회에서 시민의 공공성은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함께’를 위해서는 평등이 중요한데, 한국에서 평등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다. 나이, 성, 직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함께’는 위축되고 ‘연대’는 말로 그치기 쉽다. 한국은 공화국(republic)도, 연방(commonwealth)도 되기 어려웠다.
 
공(共)을 통한 공(公)의 탈환

  헬조선에서 벗어나 공공성이 보장되는 사회로 전환하려면 우리는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함께를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각자 서 있는 위치가 갈라지는 지점을 찾아야 어디서, 얼마나,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일단 타자의 시선에 나를 드러낼 수 있어야 공적인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폭력적인 한국사회는 그 드러냄 자체를 억압한다. 사회적인 합의를 내세워 소수자성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공공성에 관한 논의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공공성은 타자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곁을 지키는 것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와 농민·여성·장애인·소수자들이 지워지거나 죽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연대하고, 그런 연대를 통해 공통된 삶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 그런 공유(共有)의 힘이 생겨야 부패한 기득권에 의지하지 않고도 썩은 곳을 도려낼 힘을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저항과 반란들은 독점과 사유화를 강요하는 제국에 맞서 자신의 것을 탈환하려는 투쟁이기도 하다. 끼리끼리 모여 삶으로 만족하지 않고 공적인 것을 둘러싼 혼란과 싸움에 기꺼이 발을 담그며 함께 살려는 몸짓들에서 우리 시대의 공공성이 싹틀 것이라 예상한다. 그 몸짓은 나와 내 곁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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