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 유럽문화학부 교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붕괴와 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전대미문의 헌정유린 사태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붕괴한 상황, 이를 어떻게 재건해나갈지가 남겨진 숙제다. 촛불정국을 맞이하여 대학이 나가야할 바를 김누리 교수(유럽문화학부)가, 시민사회의 길을 신진욱 교수(사회학과)가 각각 진단한다. 이하 일문일답. <편집자 주>


김누리 교수와 일문일답:  촛불과 대학사회


대학의 민주주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 매주 토요일 사람들이 촛불을 들기 위해 광장에 모여들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로 바라봐야 한다. 하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10년을 거치며 완전히 무너져버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취약성,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강력한 가능성이다. 전 세계 민주주의 운동역사에 유례없는 230만이라는 숫자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에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다루며 “이제 유럽과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세계적으로 짙어진 오늘날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리는 촛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 기울여야 한다. 광장의 촛불은 정권교체나 정치교체가 아닌 ‘구체제의 교체’가 필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 이 시점에서 우리가 교체해야 할 ‘구체제’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단순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공고히 해온 구체제는 네 개의 기둥을 통해야만 그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선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서의 수구-보수 과두(寡頭)정치 체제를 들 수 있다. 우리가 그간 ‘보수’와 ‘진보’라 불러왔던 양 진영이 사실은 ‘수구’와 ‘보수’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보수다운 보수, 진보다운 진보를 만난 적이 없었다. 특히 중요한 건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가 실상 수구였다는 점이다. 진정한 보수는 김구 선생님처럼 역사와 민족,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수는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수구’라는 것이다. 진보의 경우도 그들의 정책을 국제적 기준에서 바라보면 보수라 부르는 게 맞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은 수구와 보수 두 집단의 공고한 과두체제로 이루어져 왔다.

■ 정치영역 외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경제 영역의 구체제는 자본 독재, 재벌 독재 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대학의 기업화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직장에서 사장을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재벌’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것도 대한민국 경제 체제가 기형적이라는 걸 의미한다.
다음으로 문화 영역에 깊게 뿌리 내린 병영적 권위주의 체제다. 마지막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체제다. 이러한 정치·경제·문화·지리적 특수성이라는 네 기둥이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교체된 적 없었던 구체제의 실체다.

■ 우리가 속한 대학이라는 공간도 바뀌어야 할 구체제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이젠 대학이 무너졌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는 대학생들이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역사 한가운데엔 언제나 대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구-보수체제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어온 주체는 언제나 대학생들이었다. 대학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걸음씩 앞당길 때마다 정치권은 엄청난 공포를 느껴왔다. 그런 점에서 90년대부터 시작

 
 

된 대학의 기업화는 대학 탄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구-보수 과두체제 및 재벌독재의 완성으로 가는 대학 탄압 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자(者)’를 길러내지 못 했다. 오늘날의 대학은 자신들의 모든 게 장악 당했다는 현실 직시조차 없다. 대학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공론장의 기능도 죽어버렸다. 대학과 무관한 사람이 대학을 망가뜨리고 있는데도 그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 하지 않는다. 청소노동자문제와 같은 사회적 착취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 앞서 언급한 ‘민주주의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글자에서 제도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선 민주주의자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자라는 강한 자아를 길러내기 위해선 대학에 이르는 교육 전반을 들여다봐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병영국가이자 기업국가가 만들어낸 교육과정 말이다. 거기선 그 누구도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정규 교육과정은 기존 질서의 무비판적 순응인 암기가 공부의 전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경쟁을 내재화했다. 그것으로 인간을 수치로 환원해 줄을 세우는 건 야만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모욕하는 식의 자아 파괴 교육을 받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열등하다 자학하는 원인에 이런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의무교육은 우리에게 좋은 대안을 제시해준다.

■ 유럽은 민주주의자를 길러내기 위해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가
  독일의 경우 자아가 형성되는 초·중·고 교육과정에 정치교육을 실행한다. 비판적 시각을 기르기 위함이다. 우리처럼 등수를 매기는 식의 위계적 사유는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특수한 무언가를 조금 잘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거다.
  다른 하나는 성교육이다. 우리의 성교육은 피임이나 질병 예방 차원에 그치지만, 독일은 ‘나’라는 주체에 대한 자각에까지 나아간다. 성(性)은 그저 내 안에 있을 뿐이고 특정 나이를 거쳐 욕망이 된다. 그런데 그것에 죄의식을 심어주고 또 그것을 내면화 하게 되면 권위주의적 인간이 되는 거다. 성교육 역시 일종의 정치교육인 것이다. 그래서 독일 아이들은 당당하다. 성에 대한 편견이나 죄의식도 없고, 학업으로 인한 모욕감이나 자기혐오도 없으며, 비판의식도 충만하다. 강한 자아의 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독일 사회는 건강하다.

■ 그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만든 독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나
  독일은 ‘노동이사제’가 당연한 곳이다. 기업의 이사 일반이 노동자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장 역시 노동자들을 통해 선출되었기에 노동자의 편이다. 노동유연화를 주장하는 정치권 비판은 해도 이를 실천하는 고용주 비판을 할 수 없는 우리들 입장에선 정말 놀라운 일이다. 대학의 경우에도 학생들이 총장을 뽑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수와 강의를 직접 평가하고 결정한다.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는 우리들과 너무나 다른 방식이다.

■ 그것과 비교해 우리의 대학들은 무엇이 미흡한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퇴행한 현 시국은 대학의 죽음과 실패가 가져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 되는 민주주의자가 없다는 것이 대학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취업에만 몰두하는 건 대학이라 부를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대학의 이념이란 이상적 삶의 형식을 실현하는 기획”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의 대학은 이상을 꿈꾸지도 못할뿐더러 후지고 후진적인 조직 형태로 퇴행했다. 민주주의는 이상적 삶을 꿈구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 한국 대학이 상상해야 할 구체적 모습을 그려 본다면
  근대 대학의 원형을 완성한 훔볼트에(Karl Wilhelm von Humboldt) 따르면 대학이란 교수와 학생의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공동체이다. 독일의 경우 이 학문공동체에 교수와 학생 외 학문 중간층, 그러니까 강사 및 조교가 포함된다. 독일에선 그들을 교수와 학생을 매개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라 말한다. 학문 공동체는 보편성에 입각해야 한다. 자본권력과 부당한 권위주의 및 병영문화를 비판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학문공동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관한  교수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대학 공동체를 구성원들이 마련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도 공유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마련 외에도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대학개혁을 위한 연석 포럼을 조직해 대학의 현실과 미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장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장학금과 같은 시혜적 혜택의 확장이 아닌 독일의 ‘바푀크(Bafoeg)’와 같은 ‘연구보수’의 요구다. 이는 학문공동체의 일원인 학생들의 학문 활동을 정당한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자 없는 사회에선 문제 삼는 사람을 문제 삼는다. 

정리 정석영 편집위원|yae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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