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욱 / 사회학과 교수

[국제: 2017 세계체제 지형도]

2017년은 세계 선거의 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독일은 물론 대한민국의 대선까지 앞두고 있다. 그리고 국제 관계는 새롭게 당선될 각국 수뇌부의 기조나 각국의 국민들의 선택에 따라 급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국제’면 기획을 통해 미국, 유럽, 한국 등의 선거를 다루고자 한다. 각국의 선거를 통해 세계체제는 어떻게 재편 될 것인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들여다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트럼프와 미국 헤게모니 ② 프랑스 대선과 유럽연합의 위기 ③ 독일 총선과 유럽연합의 향방 ④ 한국 대선과 우리의 과제

트럼프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백승욱 / 사회학과 교수

  2017년의 세계는 영국의 EU탈퇴(브렉시트)로 시작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끝났고,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을 알렸다. 세계 헤게모니 국가이자 영어권 ‘다문화사회’의 상징이라 할 두 나라에서 등장한 배타주의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위기가 단지 헤게모니 교체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서구 문명, 특히 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쌓아온 익숙한 것들의 위기로 진행될 수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트럼프 현상이 사람들을 경악시킨 이유는 거기에 얽힌 수많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일단 선거 결과를 잘못 예측했다. 또 대중적 불만이 폭넓게 드러남에도, 이를 전통적인 ‘계급적’ 틀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반기득권 저항’이라는 현상이 트럼프 당선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하필 트럼프라는 슈퍼갑부를 당선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는 심도 있는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이라는 오랜 미국의 양당 구도도 트럼프 현상의 해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측’은 제도의 안정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기존의 질서가 일정한 틀 속에서 사회적 불만이나 갈등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면, 트럼프 현상은 그런 제도적 틀을 통한 안정화 또는 ‘치안’이 점점 더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이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미국이 벗어났다고 보이는 시점에 트럼프 당선이라는 역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미국 헤게모니 쇠퇴의 과정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 지위 하락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쇠퇴했다는 점만큼이나 그 쇠퇴를 역전시키려는 힘 또한 강했으며, 그 때문에 매우 ‘기형적’ 궤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세계 헤게모니의 위기는 경제적 우위의 상실과 안정적 세계질서의 와해, 그리고 그에 뒤이은 새로운 경합 국가의 도전으로 이어진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미국 헤게모니 쇠퇴는 그에 앞선 세계 헤게모니 전환 과정에 비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미국의 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힘의 유례없는 강성함과 함께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금융력과 군사력이라는 두 측면에서 확인된다. 미국의 헤게모니 쇠퇴에 맞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발생하고 이는 금융세계화를 추동시켜 세계의 자본을 미국으로 재집중시키고 세계경제를 미국 금융자본의 유리한 투자처로 재편시켰다. 또한 미국은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세계의 정치-군사적 불안정화를 해결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군사력을 더욱 대대적으로 사용해 어느 때보다도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였다.
  그렇지만 좀 더 나아가 결과를 살펴보면, 이런 미국의 힘의 증대가 과연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막아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적 측면부터 보면, 금융의 힘이 증대한 이면에 금융 이외 부문의 상대적 쇠퇴와 사회적 부의 급격한 재배분(극소수에게 부의 집중)이라는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금융적 휘발성이 초래하는 금융 위기가 상시화·극대화되었다. 강성한 군사력 측면을 보면, 한쪽에서 군사비용의 대대적 증가가, 다른 한쪽에서 도전세력의 지속적 확산과 제어 불가능함이라는 문제가 보인다.
  미국은 이 통제불가능성과 비용 증대라는 악순환으로부터 발을 빼려는 ‘고립주의’의 유혹과, 과거 찬란한 미국의 세기를 다시 되살리려는 ‘팽창주의’의 유혹을 동시에 느끼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대 클린턴의 ‘신경제’에 뒤이어 그 시절을 실패로 규정하고 ‘새로운 아메리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네오콘 그룹을 배경에 둔 부시가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네오콘과 부시가 만든 미국의 힘은 지속되지 못했다. 강력한 경제적 힘을 보여준 금융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동을 거치며 ‘금융의 증권화’의 파국인 2008년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금융투자자를 구제하는 미국식 ‘금융 케인즈주의’는 수차례 반복된 ‘양적 완화’라는 수단을 활용했는데, 이는 대외적으로 천문학적 수준의 대외부채 증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의 부실화, 국내 사회정책의 약화 등을 수반하였다. 2008년 경제위기의 부담은 미국 이외 지역으로 넘겨져 세계 도처의 연쇄 위기들을 촉발했지만, 그렇다고 미국 경제의 회생이 미국 국민들의 삶의 향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상위 0.1%에 극도로 집중된 부의 편중성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다른 한편 이라크전쟁 ‘도발’로 상징되는 군사적 힘의 우위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력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라크 전쟁은 역설적으로 두 가지 부정적 교훈을 심어주었다. 첫째로 ‘대량살상무기’를 확보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미국 군사적 개입의 타겟이 될 수 있다는 점, 둘째로 미국이 세계 한 지역에 군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의 국지적 분란에 개입할 역량은 없다는 점(이른바 ‘Win-and-Win’ 전략으로 전환)이다.

수세적 민주와 공세적 민주

  미국은 점점 더 껍데기만 남은 강대국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고, 미국의 우위와 우세, 경제 위기의 극복은 극소수를 위한 성과로 여겨질 뿐이다. ‘기득권’층에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력 모두가 포함되는 이유이다.
  트럼프는 우익 포퓰리즘과 실용주의를 결합하고 있다. 대내 정책의 실용주의는 오히려 공화당 내의 대립선을 형성하기도 한다. 반면 대외적으로 ‘강한 미국’의 포퓰리즘과 실용주의는 멕시코와 중국 등으로 이어지는 대결선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좀 더 세계적 영역이 확장될 때 트럼프의 이율배반은 커진다.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반면, 미국의 힘의 우위와 함께 할 동반자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마치 ‘팽창주의적 고립주의’라고 설명해야 할 역설적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트럼프의 대응은 미국이 헤게모니 쇠퇴를 중단시키기 위해 세운 경제적 지지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금융 중심의 경제, 해외 저가 소비재 수입에 의존한 대중의 고소비, 세계의 정치적 균열을 막는 자유무역 질서 이 세 가지 모두 트럼프의 세계와 충돌한다.
  새로운 트럼프적 전환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수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는 징후로서 작동하고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중들은 첫 출발점에서 그 자체로서 ‘반민주’를 보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에 대한 극단적인 자기보호 태도를 보이는 ‘수세적 민주’라는 특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를 제로섬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면 타인의 권리에 대한 옹호가 자신의 권리를 더욱 키울 수 있다는 ‘공세적 민주’는 오히려 서로에게 금기사항이 되어가고, 결국 수세적 민주는 민주 자체에 대한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