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민 / 문학예술콘텐츠학과 석사과정

 [만물상자]

왜가리, 곤줄박이, 지빠귀

 

 

 

임정민 / 문학예술콘텐츠학과 석사과정

 

 
 

나는 처음에 이 글의 시작이 ‘나는 미래에 대해 잘 모른다’라고 말하며 시작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미래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데 이렇게 떠올린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나는 정말 미래에 대해 잘 모르는가 하는 의심이 들고, 나는 미래에 갈 수 있나 하는 생각, 다음엔 미래라는 게 있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엔 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내가 미래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만큼 미래는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미래는 하나의 권능인 것 같다.


 이것은 내가 김엄지의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를 읽고 떠오른 단상들이다. 단상인가? 그렇다면 단상들의 나열인가? 정말 나열인가? 나는 삶이 지겹고 삶의 일상적 형식들과 반복이 지겹다. 그런데 나는 지겨움은 영원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 너무 무섭고 견디기 힘든 것은 나의 삶이 일상적 형식들과 반복, 무의미, 나열이라고 규정하는 미래적 권능이다. 미래는 당신들이나, 우리들이다. 나는 우리 삶의 어떤 국면들이 의미와 무의미처럼 무엇과 무엇 중에 하나로 결정되는 것을 경멸한다.


 우리의 삶은 예를 들면 왜가리, 곤줄박이, 지빠귀 같은 것이다. 느시 같은 것이다. 이 책의 단편들 가운데 <느시>라는 작품이 있다. 이 단편은 주인공 R과 그가 근무하는 어떤 회사의 동료들과 상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상사는 매뉴얼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상사는 R에게 매뉴얼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R은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그 매뉴얼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정신이 흩어지는 탓에 계속 실패한다. 다만 그는 ‘느시’라는 폴더만을 생성해놓은 채 멈춰 있거나, 생각하고 있다.


 느시는 두루미목 느시과의 대형 조류를 말한다. 왜가리는 황새목 왜가리과의 조류이고, 곤줄박이는 참새목 박새과의 조류이며, 곤줄매기라고도 하고, 지빠귀는 검은지빠귀, 노랑지빠귀, 개똥지빠귀 등을 포함하는 조류의 명칭이다. 그런데 사실 이 사전적 의미들의 배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이 조류들의 상징성 같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왜가리도, 곤줄박이도, 지빠귀도, 그리고 느시도, 조류가 아니다. 이것은 우연히 만들어진 폴더의 이름들일 뿐이다. 정말 우연인가? 그렇다면 반복인가? 나열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이런 것이다. 우리는 느시를 모르지만 느시를 안다. 왜가리도, 곤줄박이도 지빠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본 적이 있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미래를 가본 적 없지만 미래를 알고 있고, 미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집을 열 번 읽을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두 가지 블록,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라는 두 개의 주거 단지 사이에 놓인 어두운 골목을 여러 번 통행할 것이다. 넘어지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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