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한 /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

기억으로 통하는 샛길, 골목 ③ 서촌 ‘옥류동천길’

골목에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고, 시간이 흘러 다시 거대 기업이 들어선다.
공간을 두고 싸우는 갑론을박은 철저하게 자본의 원리에 따라 진행된다. 거대한 도시에서 틈새로 들어오는 자본의 흐름을 더 이상은 막을 수 없다.
왜 자본은 골목을 파괴하는가. 우리는 왜 골목을 찾아가는가. <편집자 주>

 

감동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조 한 /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

 광화문 근처에 일이 있으면, 꼭 짬을 내 서촌 옥류동천길을 걸어보곤 한다. 서촌은 공식적인 지명도 아니며 옥류동천길이라는 도로명도 없다. 서촌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지역을 일컫는 일종의 별명이다. 물론 서촌이라는 이름 자체도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기는 하다. 종로구는 이곳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났다며 세종마을이라 부르라고 하고, 어떤 분은 원래 서촌은 정동 쪽이며 여기는 윗마을이기 때문에 상촌(上村)이라 불려야 한다지만, 사람의 첫인상이 평생 가듯이, 나와 이곳의 인연 역시 ‘서촌’으로 시작했고, 왠지 서촌이라는 말이 더 살갑게 다가온다.
 옥류동천길의 옥류동천(玉流洞川)은 옛날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청계천까지 흘러갔던 작은 하천으로,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백운동천과 함께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중요한 지류 중 하나였다.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아직도 도로 아래 하수관을 통해 흘러내려가고 있다. 몇 년 전 광화문 광장에 홍수가 나는 초현실적인 사건도 이 두 물줄기의 ‘소행’이었다. 지금은 뜬금없이 도로명 주소로 불리고 있는데, 왠지 이곳을 흐르던 옥류동천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서촌’이라는 이름에 맞을 것 같아, 나는 이 길을 ‘옥류동천길’이라 부른다. 그렇게 이 길은 나에게는 ‘서촌 옥류동천길’인 것이다.

 
 

건물에 남은 시간의 파편

 옥류동천길의 매력은 서촌의 ‘시간의 단면’을 가로지르는 데 있다.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물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산업화 시기, 최근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 삶의 공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자하문로7길’이 있다. 바로 옥류동천길이다. 골목길 따라 조금만 걸으면 오른쪽에 투명한 유리벽이 인상적인 1층짜리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철거 논란에 휩싸였던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의 집’이다. 현재 이곳은 동네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오래된 간판과 타일을 뜯어내고 드러난 80년 된 기와지붕, 목구조 앞에 덧붙여진 4~50년 된 콘크리트 구조물, 내부 공간을 개조하면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 2~30년 된 철골구조물, 그리고 살던 사람들이 남긴 낙서와 벽지의 일부까지, 옥류동천길 옆에 살던 사람들의 시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 길에는 ‘이상의 집’과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한옥들이 참 많다. 식당이나 옷가게, 갤러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대부분 1930년대 지어진 ‘집장사집’이다. 1930년대 들어 경성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건설업자들이 큰 필지를 잘게 쪼개 20평 정도 크기의 ‘도심형’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한 것인데,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와 다름없다.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 당시 근대 지성인들과 예술인들이 서촌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이다. 서촌에 있는 허름한 1층짜리 건물의 간판이나 벽을 뜯어내면, 그 속에 보물처럼 한옥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가회동 한옥마을 역시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 별 다름없다.
 통인시장을 지나 옥인길로 들어서면, 독특한 2층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건물 1층은 상가로 가려져 있고, 왼편 건물은 앞면 전체가 벽돌로 가려져 있지만, 2층의 목구조나 겹처마를 보면 영락없는 2층 한옥이다. 도로변에 면한 주거공간이 상점으로 변한 1층짜리 도심형 한옥과 달리 처음부터 1층에는 상점이, 2층에는 사람이 살도록 의도된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라 할 수 있다. 2층 한옥을 지나면 재미난 가로풍경이 펼쳐진다. 왼편에는 1920~40년대 지어진 1층 또는 2층짜리 한옥과, 1960~70년대 지어진 벽돌이나 타일 마감의 2~3층짜리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오른편에는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4~5층짜리 화강암 마감의 건물들이 100미터 정도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난 90년간 우리 건물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는 것 같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편 골목길에 흰색 대문집이 보인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인 ‘박노수 미술관’이다. 1938년에 지어진 이 집은 근대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한식, 중식, 일식 건축 양식이 뒤섞인 독특한 형태의 2층집이다. 원래 친일파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윤덕영이 살던 벽수산장과 연결돼 있었다. 1972년부터 이 집에 살던, 한국화 1세대 남정(藍丁) 박노수 화백이 건물과 함께 소장 작품을 종로구에 기증하면서 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이곳에는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철거될 때 가져온 난간석과 기둥 등 다양한 석물들이 마치 조경석처럼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데,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복원된 공간 속 사라진 시간

 거대한 빌라들의 ‘계곡’을 지나면 어느새 인왕산이 코앞이다. 그리고 그곳에 수성동계곡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옥인시범아파트가 서 있었다. 서울시가 2011년에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겸재(謙齋)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하나인 <수성동(水聲洞)> 그림을 바탕으로 수성동계곡을 복원한 것이다. 특히 아파트 철거 중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기린교(麒麟橋)가 인근 계곡에서 발견돼 원래 자리로 옮겨졌다. 수성동계곡은 여러모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인근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고 하고, 추사(秋史) 김정희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에도 등장하는 등, 조선시대 도성 내 명승지 중 하나로 여겨지던 곳이다.
 하지만 엄청난 돈을 들여 복원한 수성동계곡은 그저 잘 정돈된 조경으로만 보일 뿐,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수성동계곡에서는 서촌의 진정한 시간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전시성 사업이 그렇듯이, 장소에 내재한 시간의 가치를 망각하고 보여주는 공간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정선의 그림을 따라 복원한 수성동계곡 역시 옥인시범아파트가 내재한 시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특정한 시대의 공간을 복원했을 뿐이다. 산기슭에 남겨놓은 옥인시범아파트의 벽 일부는 옹색하기만 하다. 조금만 더 남겨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남겨진 문을 지나 거실이 있던 자리에 서서, 그 시대를 상상하며 얼마나 소중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공간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에 벽 하나 방치되어 있다.
 수성동계곡을 둘러보고 내려오니, 아까 지나쳤던 벽돌 건물 앞 긴 돌 의자에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중요한 유물 같아서 감히 앉을 생각도 못했던 돌 의자였는데, 할머니는 신발도 벗으신 채 편하게 앉아 계셨다. 할머니에게 돌 의자는 거창한 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동네 의자인 것이다. 이렇게 서촌의 매력은 관광객을 위해 시간을 정지시킨 문화 공간이나 역사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차곡차곡 기억들이 쌓여가는 ‘시간의 공간’에 있다. 할머니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도 돌 의자 한쪽에 조심스럽게 앉아 본다. 돌 의자에 앉아서 보니, 옥류동천길은 또 다른 느낌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