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10.10 수 01:57
기획학술
다원적 현대미술평론의 흐름과 갈래 - ‘이미지의 귀환’에서 ‘이론을 연기하는 아트’까지임근준 / 미술·디자인 평론가
안혜숙 편집위원  |  ahs11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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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승인 2016.11.03  00: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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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비평의 얼굴 ③ 다원예술 비평은 가능한가

21세기에 이르러 비평은 ‘대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양태를 보인다. 대중의 가능성을 끌어안으며 ‘비평가’라는 이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한, 21세기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비평’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 ‘예술’ ‘작가’ ‘권력’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 전환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이 시대 비평의 위기와 존재 의미, 더 나아가 새로운 ‘비평의 시대’에 비평가는 어떤 책무를 지게 되는지, 비평의 새로운 활로는 있는지를 모색해 보려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21세기 비평, 무엇이 문제인가 ② 비평과 권력 ③ 다원예술 비평은 가능한가 ④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


 

다원적 현대미술평론의 흐름과 갈래 :

‘이미지의 귀환’에서 ‘이론을 연기하는 아트’까지

 


임근준 / 미술·디자인 평론가

 

 전후 미국 추상미술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와 그의 모더니스트 동료들의 시대가 저문 이후, 형식주의 비평의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이종(異種)형 평론가들이 다수 나타났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메타-퍼스펙티브를 전제로, 창작활동에 직접 연루되는 평론활동을 전개해 한 시대를 일군 주인공들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수다. 그 가운데에서 지표로 삼아 고찰하기 좋은 인물이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더글라스 크림프(Douglas Crimp, 1944~)다.

 

새로운 시대의 평론가들


 정식으로 미술사를 전공한 크림프는 1967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학예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아트뉴스와 아트인터내셔널 등의 지면에 평문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후 쿠니(CUNY)의 대학원에서 수학했는데, 이때 평생의 동료가 되는 로설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를 만났고, 이 인연으로 1977년, 크라우스가 1976년에 창간한 이론지 <옥토버>의 편집자로 취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편집장으로 직함을 바꿔 단 그는 1990년 직책을 내려놓을 때까지 <옥토버>의 주축으로 활동하며, 다매체 시대의 미술 담론을 이끄는 이론 지향의 평론가로 대활약했다.


 크림프는 현장에서 작가들과 교우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또 신작을 의뢰하는 면에 있어서도 우수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주요 전시 때마다 메타 차원의 담론 분석을 제시해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추동해낸 점이 남달랐다. 그에겐 크게 세 가지 공헌이 있다.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의 대두 과정에서 전유(appropriation)의 방법론이 지니는 미적/정치적 의의를 규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 비평의 미술과 그 방법론이 지니는 의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낸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에이즈 대위기의 시대에 정치화한 미지의 역병에 현대미술이 대응하는 방식과 그의 미술사적 의의를 담론화해내며 미술창작을 사회운동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고, 소위 퀴어 미학과 이론의 성립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추상미술의 종착지에서 이미지가 귀환하게 된 이유를 밝힘으로써, 이후 다매체적 설치미술의 실험으로 이행하는 한 세대의 동역학을 담론으로 견인해냈던 셈이다.


 이에 상응하는 근례라면, 평론가 겸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를 들 수 있다. 1998년 에세이집 <관계성의 미학(Esthetique relationnelle)>을 펴내며 그는 “이제 미술 작품의 역할은,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작가의 선택에 의해 어떤 스케일로건 실재하는 삶의 방식이나 행위의 모델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단언했는데, ‘담론적 장소특정성이라는 1990년대 중반까지의 대의제를 관계특정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새로운 판단유예의 시공을 창출하고 또 공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이 책의 실제 핵심이었다.


 부리오의 이론적 얼개 아래에서 ‘관계 미학의 작가들’로 불렸던 이들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후까지 유로화 강세 시대의 유럽을 대표하는 신주류의 지위를 누렸다. 관계 미술가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특유의 도시 재활성화의 문법으로 제 몸집을 불린 주요 현대미술관의 비정형 전시 공간에 최적이었다. 미적 미디어, 공리적 미디어와 사회적 규약과 미술 제도의 프로토콜 등을 새로운 수행성의 이름으로 다시 하나로 프로그래밍함으로써, 공허하게 재단장한 2000년대식 다원예술의 공간에 한시적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니, 이곳저곳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요 작가 대부분이 결산의 성격을 띠는 회고전을 치른 상태고, 당연하게도 하나둘 차례로 역사화되고 있다.

 

   
 

 ■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로설린드 크라우스, 니콜라 부리오, 히토 슈타이얼, 더글라스 크림프.

 

무시간성의 시대, 이론의 불가능성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모더니즘의 옛 유산에 대립각을 세워온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은 완전히 유효성을 상실했다. 이제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혹은 ‘새롭지 않게 새로운’ 무시간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러저러한 비평적 진단이 내려지고, 또 시대를 총괄하는 전시들이 기획됐지만, 안타깝게도 시대를 메타 차원에서 재규정할 만한 대계를 제시하는데 성공한 평론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여기엔 다 이유가 있다.


 1980년대 초반 이래 후기 구조주의 이론을 적용해 미술작품과 미술사를 재해석하는 신미술비평과 신미술사학이 급속히 세력을 키워나갔고, 미술(사학)계 곳곳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초·중반 주요 대학원 곳곳에 미술이론/시각문화연구 협동과정이 신설됐다. 이에 발맞춰 교재로 사용할만한 앤솔로지들도 우르르 출간됐고, 구식 미술사학방법론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 새로운 학회들까지 난립했다.
따라서 협동과정식 학제 연구의 풍토에서 구식 미술사방법론 대신 메타-분석 논문만 읽고 공부한 세대는 춘하추동으로 열리는 주요 학회에 참석하며 논문 트렌드를 파악하느라 바쁜, 즉 미술계의 주요 전시를 보러 다니거나 신인 작가들과 교유할 생각을 하지 않는 새로운 ‘논문-파생-예술가 종족’으로 성장했다. 멀쩡히 박사 논문을 취득했지만, 전시를 보고 제대로 된 리뷰 하나 써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이들이 큐레이터가 돼 전시를 기획하면, 담론적 키워드를 미리 정해놓고, 그에 작가와 작업을 교과서용 도판처럼 끼워 맞춘다.


 상황이 이러하니, 2008년 이후 새로이 주목을 받은 미술계의 필자나 큐레이터는 미술사나 미술이론을 전공한 모범생들이 아니다. 오늘날 큐레이터로 각광받는 것은, (2014년 뉴뮤지엄의 관장이 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1973~) 한 명을 제외하면) 경험 많은 작가들이다. 로버트 고버는 2009년 찰스 버치필드의 회고전을 큐레이팅했고, 제프 쿤스는 2010년 다키스 조애누 콜렉션의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근례로는 듀오 미카엘 엘름그린과 잉가 드라그셋이 2017년도 이스탄불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선임된 일을 꼽을 수 있다.


 담론 차원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끈 것도 미술가다.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이론가-작가이자 작가-이론가인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1966~)이다. 그는 미술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고찰하는 작가적 퍼스펙티브를 통해, 오늘날 미술계가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는 여러 의제들을 놀랍도록 간단한 방식으로 담론화해냈다. 2009년 이플럭스 저널에 발표한 ‘미술관은 공장인가(Is a Museum a Factory)’에서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재생의 논법으로 재구축된 대형 미술관들과 그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공장과 노동자의 유비로 비평해내 큰 호응을 얻었다. 같은 해 같은 매체에 기고한 ‘저화질 이미지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the Poor Image)’에서는, 복제와 압축을 거쳐 망가진 상태로 네트워크상에 편재하는 이미지의 현 상황이 야기하는 다각적 문제를 논해 큰 반향을 얻었으며, 2011년 역시 같은 매체에 기고한 ‘자유 낙하하며(In Free Fall)’에서는, 수직적 원근법이라는 얼개로 오늘의 시공 인지가 맞은 한계 상황을 논설해 여러 추종자들을 얻었다.


 허나, 슈타이얼의 글을 이론적 저술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의 글은 중언부언하는 제 작업 세계를 지탱하는 알리바이 장치일 따름이다. 즉, 2010년대의 시공에선 이론의 빈자리를 ‘이론을 연기하는 아트’가 대치하는 꼴이다.


 2010년대 후반을 바라보는 오늘, 현대미술평론은 종류를 불문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의 노화와 함께 큰 위기를 맞는 모습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을 주도했던 특정 세대의 ‘스타’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이론을 활용한 메타-분석 결과들을 경전처럼 붙잡고 공부한 후속 세대는 사실상 다 망했다.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새로운 비전도 제시되지 못했다. 그러면 이 인물 부재, 담론 부재의 위기는 교육 제도와 프로그램의 대대적 갱신 이전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주요 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이력서라도 제출해보려면, 미술사와 미술이론 분야의 학위를 갖춰야 한다. 이런 바보 같은 공회전은 대학이 망해야 멈추게 될까? 당분간 믿을 것은 작가들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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