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현경 /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박사후연구원

혐오사회 ③ 온라인 혐오표현의 현재와 미래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혐오 발언’은 이미 그 수위를 넘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는 발언 수위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공감 부재 및 감정의 과잉은 일시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주요한 추세인가. 본 지면에서는 오늘날 ‘혐오’가 부상하게 된 이유와 국내외 혐오 사례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혐오? 차별과 평등! : <일베>와 <메갈>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것들

김신현경 /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박사후연구원


이 원고 청탁 주제는 ‘온라인 혐오표현의 진원지’로서 ‘<일베>와 <메갈리아>(이하 <메갈>)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이다. 아쉽게도 나는 우리가 <일베>와 <메갈>을 쉽게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 이미 그것은 오랫동안 특정한 꼴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질문은 젠더를 둘러싸고 기울어져 있는 상황을 못 본 척 한다. <메갈>은 <일베> 언어의 미러링 구사 진원지이지 그것과 동등한 ‘온라인 혐오표현 진원지’가 아니다. 이는 정치권을 패러디함으로써 풍자하는 희극의 언어를 정치권의 언어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유사하다.

많이들 그렇지 않다고, <일베>가 여성을 혐오한다면 <메갈>은 남성을 혐오하기 때문에 혐오정서를 퍼뜨린다는 점에서 둘은 동등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여성혐오(misogyny)는 몇몇 남성들이 어떤 여성들을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 성별분업에 기반한 이성애 정상가족 내 여성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베>는 근대 여성혐오의 연장선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미 밝혔듯, 근대 이성애제도는 남녀간의 성애적 결합을 강제하지만 그 기저에는 남성들 간 탈성애적 유대(동성사회성, homosociality)가 있다. 쉽게 말해 여성을 교환함으로써 남성들 간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바로 근대 이성애제도인 것이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인권선언문의 정신인 자유(Liberty)와 평등(Equality) 그리고 형제애(Fraternity)는 법 앞에 평등하며 자유를 누리는 공적 존재의 형상이 남성이며 그들 사이의 사랑-유대가 시민으로서의 연대의식임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인간이되 평등한 시민일 수 없는 여성, 그녀의 자리는 바로 남성 시민이 주인인 사적 가족 내에 위치한다. 근대의 여성은 이렇게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몸으로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고, 가사, 감정노동을 하는 ‘몸/성(sexuality)’이다. ‘여성혐오(misogyny)’는 이처럼 여성 존재의 몸/성으로의 환원과 이와 관련된 ‘여성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적 정서를 아울러 일컫는다. 그리고 이는 동성사회성을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homophobia)와 함께 작동한다.

‘걸레’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은 여러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혹은 맺었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더러운 물건’으로 취급한다. 제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은 결혼 내에서 한 남성과 관계를 맺도록 강제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여성은 쉽게 ‘더러운’ 여자가 된다. 그러나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남성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사회적 범주는 없다. 남성은 성관계 여부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흥미롭게도 이 말에는 여성의 성에 의존해야 하는 남성 자신의 성에 대한 비하도 숨어 있다. 걸레가 무엇을 닦느라 더러워졌겠는가?

<일베>의 여성혐오는 이를 계승하면서 변형한다. 2000년대 중반 등장한 ‘된장녀’와 ‘명품녀’는 노동의 대가로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여성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러한 명명은 여성들이 몸/성을 기반으로 노동 없이 자원을 얻는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보슬아치’와 연결된다. 이 용어는 여성들을 몸/성적인 존재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걸레’와 일맥상통하지만 기반이 되는 정서는 다르다. 앞서 보았듯 ‘걸레’가 표상하는 여성에 대한 도덕적 낙인 그리고 남성 자신에 대한 비하는 ‘보슬아치’에 이르러 여성의 몸/성 자원화에 대한 적개심과 질투 그리고 (그녀를 가질) 다른 남성에 대한 열패감으로 변형된다. 이는 <일베>가 꼴을 갖추어 온 지난 10년 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청년 남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들에게 현재는 남성들은 갖지 못한 몸/성을 가진 여성들이 이를 자원화하여 잘 나갈 수 있는 시대, 그래서 남성들에게 ‘불리한’, ‘남성성의 위기’ 시대인 것이다.


파급력은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남성성의 위기’는 언제나 특정한 ‘지배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의 위기이며 남성들 내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왔다는 것을 알려줄 따름이다. 각종 노동 관련 통계 및 지표는 1997년 IMF 위기 이후 가속화된 계급 양극화와 청년 실업의 가장 취약한 대상은 청년 여성들 그리고 소수자 남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1999년 군가산점제 위헌 판결 이후 온라인을 점령한 (남성) ‘네티즌’들은 ‘개똥녀’ ‘된장녀’ ‘명품녀’ ‘보슬아치’ 그리고 ‘김치녀’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이고 퍼나름으로써 한국여성을 ‘구제불능의 성-소비자’로 환원해버렸다. 그러니 이 시기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로 나고 자란 젊은 여성들에게 여성혐오적인 온라인 세상은 하나의 설정값이다. 이 설정값이 그녀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씹치남’과 ‘한남충’으로 되돌려주려는 <메갈>의 시도가, <일베> 및 관련 장소들이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들어온 혐오문화와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논의가 서로 중첩되면서 빠르게 번져나가는 온라인과 SNS의 특성은 <메갈> 미러링 언어의 파급력을 극대화했고 이 때문에 두 언어 집합군이 비슷한 정도의 힘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젠더를 둘러싼 상황이 여전히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메갈> 관련 티셔츠를 입은 ‘프리랜서 여자 성우’는 ‘잘렸지만’, <일베> 활동을 하며 여성혐오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린 ‘방송사 정규직 남자 기자’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이 여자 성우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웹툰 작가들의 작품이 퇴출되어야 한다며 ‘예스컷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그간 이야기되어 온 ‘표현의 자유’가 누구를 위한, 어떤 자유였는지까지 질문하게 한다.

이를 넘어서는 출발점으로 나는 <일베>의 남성성과 분절되는 현실에서의 다양한 남성성들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어떤 남성들이 적의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 지금의 상황에서 10대, 노동자, 성적 소수자, 장애인, 빈민, 이민자 남성들이 어떻게 ‘어리고’ ‘가난하고’ ‘추잡하고’ ‘모자라는’ 자로 환원되고 차별받는지, 또한 이러한 논리들이 여성성을 특정한 형태의 몸/성으로 환원하려는 힘과는 어떤 관련을 맺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남성들은 자기 내부의 소수자성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하며, 페미니즘은 소수자 정치로서의 힘을 복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성차별을 남녀 간 2자적 혐오관계와 감정으로 손쉽게 치환시키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와 평등할 수 없는 현실이 부딪혀 빚어낸 퇴행적 정서가 혐오라면, 이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많은 평등,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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