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연 / 심리학과 교수

[혐오사회 ② 혐오의 심리학적 분석]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된 ‘혐오 발언’은 이미 그 수위를 넘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는 발언 수위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공감 부재 및 감정의 과잉은 일시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주요한 추세인가. 본 지면에서는 오늘날 ‘혐오’가 부상하게 된 이유와 국내외 혐오 사례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혐오정서의 핵심은 비인간화

정태연 / 심리학과 교수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화두 중 하나가 혐오다. 혐오가 하나의 정서로서 그 나름의 정보적·행동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혐오를 느끼게 만드는 외부 자극의 특성 그리고 그 자극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의 심리를 고려하면, 혐오라는 정서 속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모습도 들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혐오라는 정서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이 글에서는 정서의 일반적 기능, 혐오의 특성 및 분노와의 관계, 혐오의 위험성 등을 살펴보겠다.


정서, 행동의 이정표

먼저, 혐오를 포함한 모든 정서는 우리가 상황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데 정보적 도움을 준다. 예를 들면, 정서는 개인적 수준에서 어떤 문제나 기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관계적 수준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보상이나 처벌을 알려준다. 정서는 집단이나 문화와 같은 좀 더 거대한 차원에서도 기능적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집단이나 문화에 대하여 느끼는 차별적 정서는 집단이나 문화 간 경계를 알려주는 신호로 작동한다.

또한, 정서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인지적 평가에 근거함으로써 그러한 평가에 따라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긍정정서를 예로 들면, 만족은 즐겁고 유쾌한 자극이라는 평가와 그에 따라 그것을 음미하려는 행동을 촉진한다. 흥미는 새롭고 신기한 기회라고 생각해서 탐색하는 행동 경향성을 증가시킨다. 열정은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목표에 접근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분노나 혐오와 같은 부정정서도 마찬가지다. 분노는 상대방이 권리나 자율성을 침해한 경우, 또는 정의나 공동체적 의무를 위반한 경우 생기는 정서다. 이때 그것이 자신과 더 관련될수록 우리는 더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분노를 경험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공격하기 쉽다. 반면, 혐오는 상대방이 순수성을 상실한 비도덕적 행위를 할 때 경험하는 정서다. 순수성이란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성질, 즉 ‘인간성’을 뜻한다. 혐오 정서를 느낀 사람은 그러한 사람을 밀어내든가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눈앞에서 그를 제거하고자 한다.

이슬람국가(IS) 대원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적군을 포로로 납치하여 무자비하게 참수했다. 그 장면을 접한 사람들은 IS 대원들에게 분노와 함께 혐오를 느끼기 쉽다.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그 행동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의나 도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한, 칼로 직접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혐오 정서도 함께 경험한다.


분노와 혐오의 분수령

이처럼 분노와 혐오는 모두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 정서로, 크게 그 차이는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상대방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은 그를 적어도 인간으로는 인정한다는 것이고 혐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대부분은 사회·문화적 영향의 산물로, 인간성의 조건은 주로 사회적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IS 대원의 참수 행위가 원시나 고대사회에서는 분노의 대상일지언정 적어도 지금만큼 혐오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칼과 창으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적을 살상했을 터이니 말이다.

한편, 분노는 때로 혐오로 발전할 수 있다. 분노에 따른 보복이나 비난 속에는 이를 통해 그 대상이 더 이상 부당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와 함께 그럴 수 있다는 기대가 어느 정도는 들어 있다. 그러나 보복과 비난의 행위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즉 그 대상이 계속 부당한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그에 대한 분노를 혐오로 바꿀 가능성이 높다. 즉, 사람들은 그 대상을 인간 이하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 행동도 비난이나 보복의 차원이 아닌 제거나 회피로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위공직자들이 불법행위를 일삼으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분노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아무 처벌 없이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면,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분노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분노할 수도 없고, 분노에 따른 행위가 아무 효과가 없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분노하지 않으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그들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겨서 혐오하면, 그들의 부당한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거나 무력감을 겪을 필요가 줄어든다.


만연한 혐오 속 희미해지는 ‘인간’

어떤 경우엔 상대방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인종 간 갈등으로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는 백인이 흑인을 혐오하는 감정이 일정 부분 들어 있는데, 이러한 감정이 흑인들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은 맹목적인 것일 수 있다. 가령, 흑인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백인이 그들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들이 자신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등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종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을 차별적으로 폄하하고 혐오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하나의 심리적 전략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인지와 그에 따른 정서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혐오한다는 것은 그들을 비인간화해서 인간인 자신과는 다른 ‘비인간’의 범주에 그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인간화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여러 행위들, 가령 폭행이나 심지어 살인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예컨대, 부시 행정부가 이슬람 과격단체들을 악의 무리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혐오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동시에 그들을 살상하는 것은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위험한 존재를 제거하는, 그래서 칭송받을 만한 행위로 탈바꿈한다.

그러면 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혐오를 드러내는 행동이 많아졌을까?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분노의 대상이 여러 비난이나 공격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조리가 전혀 해소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분노가 아닌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다. 또 다른 이유로, 자신은 도덕적인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자기 편향적인 인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인식 속에서 상대방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간단히 비인간화시켜 버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에 비해 오늘날 혐오와 같은 부정정서를 손쉽게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문화적 행위규범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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