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한 /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


기억으로 통하는 샛길, 골목 ② 마포구 서교동 홍대앞

골목에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고, 시간이 흘러 다시 거대 기업이 들어선다.
공간을 두고 싸우는 갑논을박은 철저하게 자본의 원리에 따라 진행된다. 거대한 도시에서 틈새로 들어오는 자본의 흐름을 더 이상은 막을 수 없다.
왜 자본은 골목을 파괴하는가. 우리는 왜 골목을 찾아가는가. <편집자 주>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 홍대앞 이야기

조 한 /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

‘홍대앞’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여기저기 즉흥적으로 열리는 버스킹 공연, 한밤을 새하얗게 태우는 클럽의 북적거림, 예술가들의 소소한 터치를 만끽할 수 있는 프리마켓, 거리를 오르내리는 거리미술전 등. 하지만 정작 거리를 둘러보면 별반 홍대앞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SPA 매장까지, 가게만 보면 여기가 홍대앞인지 명동인지 가로수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홍대앞을 찾는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것일까.

홍대앞 연대기

역사적으로 보면 홍대앞이 자리 잡고 있는 와우산 앞은 서해안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양화환도(楊花喚渡)나 양화진(楊花津) 그림을 보면 양화진 쪽으로 가는 수많은 배들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는 당인리발전소(현 서울발전소)가 양화진 인근 한강변에 자리 잡으면서 발전소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이 와우산 앞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하지만 홍대앞이 본격적으로 마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부터이다. 1955년 홍익대학교가 와우산 기슭으로 이전하는 것과 함께, 1957년 서교구획정리사업과 한강택지개발조성사업으로 지금의 홍대앞 도시 구조가 만들어진다. 특히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1965년 개통되면서, 홍대앞은 점차적으로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큰 규모의 필지는 고급 주택으로 채워지고, 작은 필지는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ICA)의 지원을 받아 알록달록한 ICA주택들로 채워진다. 지금도 골목골목 당시 ICA주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70년대 들어 미대생들과 건축학도들의 작업실들이 주택가로 스며들고,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들도 하나둘 생겨난다. 홍대 도예과를 졸업한 아티스트가 만든 <흙과 두 남자>는 천정에 매달린 그네 덕분에 데이트하기 좋은 카페로 유명했고, 최초의 인터넷 카페라고 할 수 있는 <일렉트로닉스>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1984년에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지역으로 변모함에 따라,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는 자연스럽게 ‘피카소 거리’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80년대 대중문화의 중심은 홍대앞이 아니라 인근 신촌이었다. 특히 주변에 대학들이 몰려 있는 신촌로터리는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홍대앞이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90년대가 되어서다. 신촌에서 시작한 락 카페와 재즈 바가 홍대앞으로 넘어오고, 1992년에 최초의 홍대앞 클럽 <발전소>, 1995년에 노브레인과 크라잉넛 등 인디음악의 산실인 라이브 클럽 <드럭>이 문을 열면서 점차 홍대앞은 젊은이들에게 ‘쿨’한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002년에 홍대앞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과거 쓰레기 매립장이던 난지도 인근 상암동 일대에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면서 홍대앞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된다.

특히 1.2km의 폐선된 철길 위에 자리잡은 판잣집들을 철거하고 ‘걷고 싶은 거리’를 조성하는 사업도 그 중에 하나였다. 원래 이 길은 당인리발전소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길이었다. 그러다 70년대 들어 발전소의 화력원을 석탄에서 액화가스로 바꾸면서 철길은 버려지게 되고, 그 자리에는 판잣집들이 하나둘 들어선 것이다.

김밥과 떡볶이, 순대와 어묵을 파는 분식집들이 많았던 판잣집 골목은 ‘먹자골목’으로 불리며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8년 걷고 싶은 거리 사업으로 먹자골목은 모두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널찍한 공간에는 일차선 차로와 새로 심은 가로수, 거리 공연과 전시를 위한 작은 공간들이 들어선다.

 
 

사라지는 공간, 지켜내는 기억

흥미롭게도 먹자골목 철거는 옛 철길 위쪽 공간에도 큰 변화를 촉발하게 된다. 철길 위에 판잣집이 늘어서 있던 먹자골목 쪽과 다르게 위쪽에는 2층짜리 건물들이 철길을 등지고 늘어서 있었다. 철길 쪽 건물 입면에는 고작해야 환기용 창과 쪽문 정도만 있다면, 반대편에는 제법 큰 창들이 건물을 가로질렀다. 사람들 역시 노상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옛 철길 쪽보다는 시장이 있는 ‘시장골목’ 쪽으로 걸어 다녔다. 곱창집이나 국밥집 등 대중적인 음식점들이 주로 자리잡은 시장골목 쪽과 달리, 반대편은 고작해야 보신탕집 정도였다. 하지만 아래쪽 판잣집들이 사라지면서 길 가운데가 열리자 사람들은 좁은 시장골목 쪽이 아닌 널찍한 주차장길 쪽을 정면으로 인지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 쪽으로 통행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간적인 역전(逆轉)은 주차장길 쪽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공간이 ‘서교365’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예술가들의 역할이 컸다. 주변 집들에 비해 월세가 저렴했던 이곳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사랑받았는데 이들의 작업실은 단지 작품을 만드는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이자 판매하는 상점이었고, 동시에 다양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로서 새로운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특히 서울시와 마포구가 먹자골목 철거에 이어 걷고 싶은 거리 2단계 사업으로 서교365마저 철거하려 하자 <로베르네 집(Chez Robert)>, <노네임노샵(No Name No Shop)>과 <오픈스튜디오 플러스>는 서교365에 입주해 있는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서교365>란 이름의 모임을 조직하여 다양한 예술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2006년에는 <나는 이 건물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그들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작가와 상인, 그리고 동네주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서교365의 소중한 기억을 기록에 남기는가 하면, 건축가와 협력하여 서교365를 실측하여 모형으로 만드는 등 서교365의 가치를 끊임없이 홍보했고, 결국 서울시와 마포구도 서교365 철거를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서교365에 더 이상 <서교365>는 없다. <노네임노샵>은 2008년에 문래동 예술촌으로 떠나면서 그 자리는 와인 바가 대신하고 있고 연남동으로 떠난 <로베르네 집>에는 같은 이름의 파스타집이 한동안 있다가, 이제는 그 이름조차 사라진 일식집으로 바뀌었다. 치솟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디자이너들이 직접 제작한 옷과 장신구를 팔던 가게들도 다 떠나고 그 자리에는 보세 옷과 중국제 장신구를 파는 가게들로 채워졌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피해자인 예술가들이 정작 젠트리피케이션을 가능하게끔 공간의 숨겨진 가치를 찾아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화에도 불구하고 홍대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홍대앞만의 독특한 커피숍도, 옷가게도, 액세서리 샵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홍대앞의 매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홍대앞만의 ‘기억의 공간’, 그리고 ‘공간의 기억’에 있다. 서교365에 더 이상 <서교365>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의 흔적 하나하나가 서교365의 벽과 바닥과 천정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홍대앞을 찾는 것은 이런 ‘공간의 기억’에 끌리기 때문이다. 보세 옷과 중국제 장신구를 사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홍대앞만의 ‘공간의 기억’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홍대앞의 ‘공간의 기억’을 소비하면서 우리 자신만의 또 다른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