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식 / 대전대 리버럴아츠컬리지 교수

과학스크린 ④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 천구의 음악

본 기획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학’분야의 학술적인 주제들을 고민해 보고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도록 그 의미를 확대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 <박사가 사랑하는 수식>을 통해서 수학과 음악, 우주의 기호에 대해 알아보고, 과학철학과 미학의 만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음악과 과학의 만남
 

천구의 음악

 

원준식 / 대전대 리버럴아츠컬리지 교수

 

불의의 사고로 기억이 멈추고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박사. 그런 그에게 쿄코는 늘 ‘새로 온 가정부’이고, ‘매일 처음 보는’ 새 가정부에게 그는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신발 사이즈가 얼마인가?” “전화번호는 몇 번이지?” 그러고는 그녀의 신발 사이즈가 4의 계승(4×3×2×1)이라서 고결한 24이고, 전화번호(576-1455)는 1억까지의 자연수 중 소수의 개수(5,761,455)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쿄코의 생일(2월 20일)과 자신의 시계에 새겨진 번호(284)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발견하는데, 220과 284는 각각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상대수가 되는 우애수(友愛數)이며, 이는 ‘신의 의도에 따라 운명적으로 연결된 수’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모든 것을 수와 수적 관계로 환원시켜 이해하고, 그것이 드러내는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이처럼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수학 박사의 이야기다.
박사는 “물질과 현상에 좌우되지 않는 불변의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수의 추상성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상의 세계에 대해 그 본질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비시키고, 그 추상적인 세계의 원리가 수와 수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피타고라스와 천구의 음악


수가 세계의 본질적인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은 서양문화의 오랜 전통에 속한다. 기원전 6세기에 피타고라스학파는 ‘수의 원리가 만물의 원리’라는 전제하에 자연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음악에서 발견한 원리는 현의 길이와 음높이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즉, 진동하는 현의 길이가 1:2, 2:3, 3:4의 비를 이룰 때 협화음이 산출되며, 그것은 각각 옥타브와 5도, 4도 음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협화음을 산출하는 비율이 처음 4개의 자연수 1, 2, 3, 4로 구성된다는 것은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에서는 그 수들이 모두 곱해져서 고결한 수 24가 되었다면, 피타고라스학파에게는 그 수를 모두 더해(1+2+3+4=)10이라는 보다 높은 질서의 통일성을 이룰 뿐만 아니라, 물·불·공기·흙의 4원소를 상징하거나, 점·선·면·입체의 공간 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그 안에 자연의 원리와 우주의 조화를 담고 있는 형이상학적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 수들에 근거하고 있는 협화음 역시 우주의 조화 즉 하모니(harmony)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음악에서의 발견을 천체들의 운동에 적용할 수 있었다.
고대인들은 천체들이 일정한 속력으로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별 자체의 운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별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공 모양의 수정체 천구에 박혀 있으며, 이 천구들이 회전하면서 별을 운반한다고 생각했다. 즉, 천체들의 원운동은 별 자체의 운동이 아니라 바로 이 천구들의 회전에 의한 것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처럼 거대한 천구들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소리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그 소리들이 조화로운 음악을 산출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천체들의 조화로운 운동이 음악적 하모니의 원형이라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데, 천체들의 운동은 단순히 ‘조화롭게’ 보인다는 막연한 주장을 넘어 명백히 음악적인 연관을 갖고 있었다. 즉,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는 행성들의 속력과 간격(interval)이 음악에서의 음정(musical interval)들과 동일한 비례를 이루고 있다는 것, 따라서 태양과 달을 포함한 7개의 행성들(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운동에 따라 온음계에 상응하는 음들(도-레-미-파-솔-라-시)을 하나씩 산출함으로써, 지상의 음악처럼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천구의 음악’은 서양 음악이론의 출발점인 동시에 천문학의 출발점이었고,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문학적 탐구와 음악이론의 기본 전제를 구성했다. 이는 17세기 초에 이르러 과학혁명의 주역인 케플러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케플러의 천문학과 천체의 하모니
 

케플러는 천문학자로서 행성이나 별들의 실제적인 운동을 설명하기보다 그 운동을 지배하는 원리를 찾으려 했고, 그 원리가 음악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수학적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그는 ‘천구 음악’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과학사와 음악사 모두에서 이전과는 다른 지평 위에 서 있었다.
과학사의 측면에서 그는 기존의 지구 중심 천문학 대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체계를 받아들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그 배열과 운동이 기존의 체계에서와는 다르게 설정된다. 따라서 지구 중심 체계에서 행성들의 거리와 속력을 측정하고 그 속에서 협화음의 비율을 찾았던 기존의 이론들은 새로운 체계에서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양 중심 체계에서는 6개의 행성(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7개 행성들의 운동이 각각 온음계의 7개 음을 구성한다는 기존의 설명은 더욱이나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음악사의 측면에서, 그는 다성음악의 발전과 함께 변화하는 협화음 체계 위에 서 있었다. 전통적인 피타고라스 체계에서는 옥타브 이외에 4도와 5도 음정만이 협화음이었지만, 다성음악의 발전과 함께 3화음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3도와 6도 음정도 협화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천구의 음악’ 이론이 근거하고 있던 피타고라스 체계가 3도와 6도까지 협화음으로 포함하는 순정률(純正律)에 의해 밀려났는데, 이처럼 달라진 협화음 체계 역시 천체 하모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했다.
케플러는 과학사와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에서 ‘천구의 음악’을 재구성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순정률의 비율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화성에 대한 오랜 연구 끝에 행성들이 원이 아니라 타원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함께 천체들의 운동이 천구의 회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별 자체의 운동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원운동과는 달리, 타원운동에서는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최대 거리와 최소 거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행성들의 속력은 최소 거리를 갖는 근일점에서 가장 크고, 최대 거리를 갖는 원일점에서 가장 작다. 케플러는 행성들이 갖는 이런 거리와 속력들에서 순정률의 비율을 발견하고자 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그 비율을 발견한 것은, ‘마치 태양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근일점과 원일점에서의 운동을 비교했을 때다. 즉, 태양에 있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행성들이 24시간 동안 움직이는 호(arc)의 길이를 산정한 것인데, 그 길이는 궤도상의 거리가 아니라 태양에서 바라보는 각도의 차이 즉 각속도(angular velocity)에 해당한다. 케플러는 6개 행성들의 근일점과 원일점에서의 각속도들에서 순정률의 비율로 환원되는 관계들을 발견함으로써, 천체 운동의 하모니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구상은 지속적인 과학적 산물로 귀속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혁명의 중요한 성과인 행성 운동 법칙들이 발견됐는데, 공전주기에 관한 3번째 법칙에 그가 붙인 이름은 ‘조화 법칙(harmonic law)’ 즉 ‘하모니의 법칙’이었다.


영화에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오일러의 공식(Euler’s formula)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던 젊은 시절의 박사에게 그 공식(  )이 영원한 결핍을 의미했다면, 쿄코와 그녀의 아들 루트를 만난 후에 그 공식( )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e도  π도 도 서로 아무 관계가 없지만, 여기에 한 사람이 하나만 더해도 세상이 달라진다.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되어 무(無)의 세계에 둘러싸이게 된다.” 결국 그가 수에서 찾은 가장 큰 신비는 피타고라스와 케플러가 그랬듯이 조화 즉 하모니의 원리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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