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신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한국사회의 종교 지형 ④ 천주교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인간은 종교적 동물(homo religiosus)이라고 할 만큼 역사적으로 종교가 없는 시대가 없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인구의 절반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본 기획에서는 종교가 한국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 한국 종교의 정신적 가치와 사회·문화적 현상과의 관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해방을 향한 역사로부터의 서신

교회 공동체의 사회적 책무

 

함세웅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신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원고를 마무리하던 중 5월 24일 오전 11시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재규 의인 등 여섯 분의 제36주기 합동 추모식에 참석하고 사형 터와 묘소를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숨결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저는 문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을 떠올리면서 이 형무소를 거쳐 간 수많은 순국선열들과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동지들, 분단 타파와 통일을 위해 산화해 가신 숱한 선구자들을 기리며 마음속에 모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장 13절)는 성경 말씀을 김재규 장군에게 적용하며, 침묵하고 외면만 했었으면 호의호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유신의 핵을 제거한 그의 결단은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희생임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했습니다.

 

골고타 언덕이 바로 교회의 탄생지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는 예수님께서 사형당하신 골고타 언덕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한 자리라고 설파했습니다. 골고타, 그 사형 터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전례와 영성 그리고 사회적 투신의 첫 자리이며 원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이를 극복한 부활의 체험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당시 무려 300여 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으며 지하무덤에서 생존했습니다. 까따꼼베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관용 선포와 함께 박해받았던 교회가 이제는 황제의 보호를 받는 제국교회, 권력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가톨릭은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사회 전체의 중심 곧 권력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부귀영화의 이 교회를 신학자들은 오히려 부패의 길에 들어선 ‘쇠퇴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두 개의 무덤, 곧 회칠한 무덤과(23장 27절) 빈 무덤(28장 2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온통 썩었다는 위선의 모습이고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든 것을 비운, 헌신과 청빈의 상징입니다. 빈 무덤의 교회가 바로 부활과 희망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중세 가톨릭은 사실 부끄럽게도 반(反)복음적, 비(非)신앙적 행태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십자가 예수님을 따라가며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이웃에게 헌신하는 수도자 운동도 펼쳐졌습니다. 수도자 운동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 제도에 대해 늘 제동을 거는 정화의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자 운동이 활발할 때 교회는 정화되고, 권력으로 치달을 때 그 교회는 늘 부패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를 은총과 제도의 긴장 관계로 설명합니다. 그 후 계몽시대, 과학문명의 시대를 거치며 400여 년 동안 가톨릭은 세상을 외면한 은둔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톨릭이 1962-65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그동안 배타적, 독선적, 폐쇄적이었던 자세를 떨쳐버리고 세상과 역사, 인간 모두를 껴안는 개방적 자세로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전체를 포용했습니다. 가히 신앙의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중세 가톨릭은 체제와 제도 정립에만 몰두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이제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고 살아가는 해방의 교회, 민중의 벗이 된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 투쟁의 신학적 결론


1960-70년대는 한국을 비롯한 남미와 아프리카 등 많은 후진국은 불의하고 부패한 군부독재 하에서 모든 민중이 짓밟힌 삶을 살았던 때였습니다. 바로 이때 세계 곳곳에서 민중들은 자신 안에 내재한 자유의 염원을 확인하고 목숨을 걸고 해방을 위한 투쟁에 들어섭니다. 이 투쟁의 삶을 성경 안에서 새롭게 종합한 사상이 바로 해방신학입니다. 해방신학은 인간의 존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셨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보장된 자유를 결코 억압하거나 빼앗지 않으셨다는 신학적 원리를 새롭게 깨닫고 확인하면서, 절대자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자유를 어떻게 불의한 독재 권력자가 억압하고 빼앗을 수 있는가 하고 항변하며 저항한 것입니다.
또한 독일의 나치 히틀러에 대항해 미친 운전사를 버스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본회퍼 목사의 선포를 늘 되새겼습니다. 특히 600여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 가스실에서 살해되어 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때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면서 불의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 교회는 결코 존재 이유가 없다는 신학적 결론과 함께 불의한 현실에 눈감았던 교회의 잘못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이에 신앙의 사사화(私事化)를 넘어 공동선 실현을 위해 헌신해야 할 교회 공동체의 사회적 책무를 새롭게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모름지기 개인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세상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는 그 보편적 사명을 올바로 인식한 것입니다.

 

사제들의 길잡이, 역사 현장의 청년들


1960년 4·19 민주혁명의 감동을 간직하며 희망의 미래를 꿈꾸던 바로 그때 1961년 5·16 군사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함께 현대사에서 가장 부끄럽고 뼈아픈 사건입니다. 대구교구의 서정길 주교는 이효상을 앞세워 유신 정권과 야합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호남 배제의 정치적 기틀 마련에 일조했습니다. 하느님과 역사 앞에 매우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1974년 긴급조치 발동으로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민청학련 200여 명 이상의 청년 학생 등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사제들은 역사 현장에 뛰어들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에 맞서며 억울한 이들의 석방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일제 침략 시기에 민중을 깨우치고 항일투쟁에 앞장선 주역이 바로 청년 학생들임을 재확인하고,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 민중의 삶으로 초대해 준 이들도 바로 이 청년 학생들임을 깨닫고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더 큰 손길과 섭리를 감지했습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종교적이며 정치적입니다. 종교와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만일 성경에서 정치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빈껍데기만 남습니다. 인간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종교적으로도 더욱 풍요롭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모든 억압의 구조에서 인간을 해방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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