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스몰 <뮤지킹음악하기>

[편집자의 서재]

음악은 일상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크리스토퍼 스몰 지음, 조선우 외 옮김, <뮤지킹음악하기>(효형출판, 2004)

 
 

일상과 음악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오늘에 와서 음악은 소비를 부추기는 대상이 되거나, 자신을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물성까지 갖게 되었다. 무형의 시간예술로 규정되던 음악의 정의를 ‘유형의 어떤 것’으로 바꾸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 대중음악이든, 클래식음악이든, 전통음악이든 상황이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음악이 과거 ‘삶 속에 존재하던 음악’에서 ‘어떤 특정한 곳, 특정한 위치에 존재하는 음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일상과 분리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은 음악이 왜 일상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식 건물들이 생겨나면서 연주자와 관객이 철저하게 분리되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시대적 경계도 생겨난다. 이러한 경계는 연주자와 관객, 작품과 작품의 경계뿐만 아니라, 외부와 내부, 희극과 비극, 개인과 개인 등으로 번져 일상에서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연주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나 지위, 취향 등 코드가 맞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느낌 때문에 낯선 사람과 나란히 앉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와 단절돼 고립된 상태에서도 고독한 개인으로서 작품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으며, 적당한 사회적 유대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뿐만 자신이 음악을 누리는 동안, 또는 연주하는 동안 연주회장의 직원들은 자신을 예의와 존중의 마음으로까지 대해 주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콩쿠르, 의상, 악기, 소리, 객석, 입장권, 작품, 청중, 예술가 등 오늘의 음악은 세상 모든 구조를 환상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보이지 않던 그 자체에 너무 많은 신화를 투사하게 된 것이다.

음악 그 자체는 신화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 스몰은 ‘뮤지킹 musicking’이라는 단어를 더해 그동안 명사로 인식되어 오던 ‘음악’을 다시 ‘음악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옮겨놓고자 한다. 서구에서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연향이 있거나 제의가 있을 때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연행자와 관중 사이의 적절한 거리는 있었지만, 제의에서도 그 시간은 ‘함께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는 말인데,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중의 연향도 마을의 제의도 행위이지, 작품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경외하는 음악가나 음악의 순간, 즉 타고난 이의 ‘perform’이란 그 시간을 ‘함께 음악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는 행위여야 한다.

이처럼 음악은 삶과 이상의 세계를 때로는 매개하고, 때론 분리시키면서 인간을 위로해 왔다. 스몰이 말하는 것처럼 “음악하기라는 행위는 우리의 가장 심층적인 가치들 가운데 일부를 표현하고 드러내 줄 수” 있을 때 그 의미가 생겨난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찬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노동요는 없으며, 연주자에게는 ‘맞다’ ‘아니다’만 있을 뿐,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해야 하는 음악은 사라져 가고 있다. 스몰에 의하면 그러한 모든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음악이 아니다. 일상에 흐르는 음들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아, 좋다!’가 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우정 편집위원|jeongwj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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