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과학스크린 ③ 영화 <엑스 마키나>와 인공지능 vs. 인간

본 기획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학’분야의 학술적인 주제들을 고민해 보고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도록 그 의미를 확대해 보고자 한다. 최근 바둑 기사 이세돌과 알파고와의 대결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인공지능’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 <엑스 마키나>를 통해서 ‘인공지능’이 과학적으로 어떤 원리를 갖고 발전하였으며, 그에 따라 오래도록 함께한 인류의 주제와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로봇과 섹스하는 날이 올까?

 

김상욱 /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To erase the line between man and machine is to obscure the line between men and gods.”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지우는 것은 인간과 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로봇과 섹스를 할 수 있나? 바로 답하기 쉽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당신은 포르노를 보는가? 역시 바로 답하기 쉽지 않을 거다. 영화 <Her>에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남성이 등장한다. 사실 <Her>의 인공지능은 목소리만 가지고 있다. 목소리만 가진 여성과 남성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인터넷 채팅사이트에 빠지는 남성들은 대개 이후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을 거다. 비록 실현되기는 힘들지라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Her>는 여성용 영화다. 누군가 <Him>을 만들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가진 인공지능로봇 에바가 인간 남성 칼렙을 유혹한다. 이 점에서 <엑스 마키나>의 설정이 좀 더 현실적이다. <Her>와 <엑스 마키나> 모두 유혹당하는 것이 남성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남성이 더 잘 속기 때문일 거다. <엑스 마키나>의 남성 버전 <엑스 마키노>가 기대되는 이유다. <엑스 마키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이냐는 흔한 질문을 이성 간 연모의 감정과 복잡하게 뒤섞어 놓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과 비슷하다는 것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Her>에서 인공지능의 목소리 역을 맡았던 스칼렛 요한슨이 실사판 <공각기동대>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은 우연이 아닐 거다.

 

 

인공지능이 나를 유혹한다면?


 
 
<엑스 마키나>가 던지는 화두는 다소 진부하다. 인간과 닮은 인공지능로봇은 인간인가? 튜링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해서 상대가 인간인지 인공지능인지 판별하는 테스트다. 만약 구분할 수 없으면 인간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거다. 2014년 러시아 연구진이 만든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 있다. 필자도 이 녀석과 인터넷으로 10분 정도 대화를 해봤는데, 처음 5분간은 대충 인간이라 믿을 만했다. 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지면 “저 같은 어린아이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라며 말을 돌린다. 10분 정도 해보면 한계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3세 아이가 어른과 10분 동안 대화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엑스 마키나>의 에바는 이미 튜링 테스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인간이 오히려 에바의 말에 속을 정도다. 더구나 에바는 그의 성적 매력을 이용할 줄도 안다. 물론 에바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겉모습만 보면 어떤 남자라도 깜박 속아 넘어갈 거다. 사실 여기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인공지능이 분야에 따라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 인정하는 바다. 컴퓨터보다 더하기를 더 빨리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글보다 검색을 더 빨리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인공지능은 인간이 가진 감정, 직관, 미적 감각 같은 것들을 모사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 통념이다. 그래서 <엑스 마키나>가 가장 원시적 의식인 성적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흥미롭다. 물론 에바 자신이 성적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상대로 하여금 성적 감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뿐이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음미해 보면 된다. 포르노라는 3차원도 아니고 2차원(!) 동영상에도 남성은 강하게 반응한다. 하물며 실물에 가까운 섹시한 로봇이 남성을 유혹하는 것은 아주 쉬울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여성 로봇은 <Her>와 같은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다시 한 번 여성용 영화 <엑스 마키노>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시각적 요소에 덜 지배받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이런 논의에서 불편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공지능을 평가함에 있어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진법과 뉴런 사이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인간의 뇌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기에는 튜링머신이라는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다.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언어는 적절한 문자(예를 들어 알파벳)로 표시할 수 있다. 각 알파벳은 모두 숫자에 대응시킬 수 있다. A는 1, B는 2,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모든 문장은 다 숫자의 나열이 된다. 모든 숫자는 이진법으로 표시할 수 있다. 결국 모든 행동은 0 또는 1의 나열로 나타낼 수 있다. 0 또는 1이 될 수 있는 정보의 기본 단위를 비트라고 부른다.
이제 컴퓨터가 생각하거나 판단한다는 것은 0 또는 1로 된 일련의 수열을 역시 0 또는 1로 된 다른 수열로 바꾸는 거다. 튜링은 모든 수학적인 연산과정을 이런 0 또는 1로 된 수열의 조작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여기서 조작이란 한 번에 하나의 비트를 읽어서 수행된다. 여기에는 엄격한 문법이 필요하다. 결국 수학적 연산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튜링머신이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기본 원리다. 따라서 인터넷이건 무선통신이건 이동하는 정보는 모두 0과 1의 수열이다. 실제 0볼트 전압이 0을, 5볼트 전압이 1을 나타낸다.
반면, 인간의 뇌는 뉴런이라는 세포들의 집합체다. 뉴런은 전기신호를 입력받아 다시 전기신호로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입력은 수천에서 수만 개의 다른 뉴런으로부터 들어온다. 들어온 전기신호가 누적되어 어느 임계값을 넘으면 외부로 전기신호를 내보낸다. 이게 하나의 뉴런이 하는 일의 전부다. 뉴런과 뉴런 사이는 시냅스라는 부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냅스는 전기신호를 화학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전기신호로 바꾼다.
당신이 이웃한 두 사람과 나란히 손을 잡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왼쪽 사람이 손을 꼭 쥐면 당신에게 신호가 온 것이다. 당신이 신호를 전달하고 싶다면 오른쪽 손을 꼭 쥐면 된다. 사람이 뉴런이고 맞잡은 손이 시냅스다. 실제 뉴런은 손이 수천 개 달린 괴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시냅스의 특징은 그 세기가 변할 수 있다는 거다. 당신 손아귀의 힘이 세다면 약하게 손을 쥐어도 옆 사람에게 신호가 쉽게 전달될 것이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면 쥐어도 옆 사람이 모를 거다. 학습을 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시냅스들의 세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는 다리 근육의 움직임을 일일이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를 자꾸 타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다리가 자동으로 적절히 움직인다. 자전거를 타는데 필요한 움직임을 일으키는 뉴런들의 연결이 강화된 것이다. 이것이 학습이다. 일단 학습이 끝나면 입력에 대해 원하는 출력이 나온다. 학습과정에서 어느 시냅스가 어떻게 강화되는지 알 필요 없다. 사실 알기도 힘들다.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지능의 원리도 이와 같다. 신경망 회로의 노드라 불리는 것들 사이의 결합강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학습이다. 노드가 뉴런이고 결합강도가 시냅스인 셈이다. 결국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뇌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 거다.
컴퓨터와 달리 여기에는 논리적 문법이 없다. 그냥 무수한 반복학습을 통해 입력과 출력이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인간이 만든 신경망 회로도 인간의 뇌 못지않은 직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파고-이세돌 시합은 보여주었다. 어차피 인간의 뇌도 적당한 입력-출력이 연결되도록 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의식이 의식의 절대 기준이 되어야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알파고는 인간의 직관이 이해할 수 없는 수를 두었지만 어쨌든 이겼다. 그가 기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보다 낮은 의식일까? 적어도 바둑이라는 두뇌게임에서 알파고를 이길 사람은 없다.
좀 더 나가보자. 인간이 가진 감정이나 미적 감각, 도덕성 같은 것이 왜 중요할까. 이런 것들은 사실 우주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은 아닐까? 에바가 칼렙을 배신하고 도망쳤지만, 에바에게 도덕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런 모든 개념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유효한 것일지 모른다. 그녀(?)가 가진 섹시함의 의미는 뭘까? 에바는 인간의 방식으로 번식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엑스 마키나>는 로봇과 섹스할 미래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며, 우리는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인공지능이 도달할 의식은 우리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금붕어가 상대성이론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