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판' 벌이다 -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하기

두 번째 '판' 벌이다 -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하기

 

본지는 누구나 함께 모여 시론하고 잡담하는 민주적 공론장 ‘판’을 연다. 모두가 말하는 곳에는 여유가 없지만, 모두가 말하지 않는 곳에는 생기가 없다. 팍팍한 삶 속에서 공적인 이야기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날, ‘판’을 통해 꺼져가는 청년 담화의 불씨를 살려내어 다시금 말의 생기를 느낄 수 있는 작은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 연속기획 ‘판’은 3월부터 5월까지 매달 진행되며, 본 지면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해치지 않아요, 정치 이야기일 뿐이에요

 

우리가 정치에 관심과 호감을 갖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는 우리 모두의 삶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바꾸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는 유독 정치 이야기만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한 채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한 걸까. 제20대 총선 다음 날이었던 4월 14일, 판에 모였던 네 명의 원우들이 함께 나눈 정치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학원 앞 원형벤치에 모였던 원우들은 당일 불었던 강한 바람을 피해 대학원 106호로 자리를 옮겼다.

 

 
 

 

사회자_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하기’입니다.
식초절임_ 반갑습니다. 오늘 주제를 보고 다른 사람과 정치 이야기를 했던 경험을 떠올려 봤는데, 별로 없더라고요. 정체성을 이미 암묵적으로 확인한 사람들끼리만 정치 이야기를 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탄산음료_ 정치 이야기를 하려면 피아식별부터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왜 피아식별 없이는 정치 얘기를 하지 못하는 걸까요. 아마 다른 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 결과가 대개 부정적이라서 아닐까요?
식초절임_ 그런 직접 경험의 영향일 수도 있고, 언론에서 꼴통 보수다, 빨갱이다 하는 이야기들도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 아닐까요. ‘나 빨갱인가? 건전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나를 빨갱이로 보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또 우리가 토론에 익숙하지 못하다 보니 생산적인 토론보다는 소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부침개_ 게다가 정치인이나 정치제도를 중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왕왕 있어요. 지기 싫어서 서로 싸우듯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요.
사회자_ 혹자는 이런 걸 ‘과잉정치화’라고 합니다. 중앙정치, 청와대나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와 매우 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하면서 정치인들의 언사는 마치 내 일인 양 과민반응하고요.
식초절임_ 무관심한 것과는 반대로 그 또한 문제네요. 상대가 나를 이기려고 한다는 느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과는 대화하기가 싫고,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지 못해요. 타인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고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너와 내가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며 합의점을 도출하겠다는 자세도 필요하겠네요.
사회자_ 좋은 이야기네요. 혹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부침개_ 중, 고등학교 시절 위인전이 너무 재미있고, 거기에 쓰여 있는 이상향이 좋아서 열심히 읽었어요. 말하자면 사람 중심으로 세상, 사회를 이해했던 거죠. 좋은 사람들이 사회에 공헌하면 사회가 더 좋아지고,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 공헌하며 살면 되겠지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2008년 광우병 사태가 벌어지고, 시민들이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전혀 반영되지 않는 거예요. 광화문에는 명박산성이 설치되고요. 개인이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잘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식초절임_ 맞아요. 광우병 사태가 많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도 있었죠.
부침개_ 그런데 뭔가 미국을 원망하지 않는 쪽으로 배웠던 것 같아요. 그때도 뭔가 답이 정해져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나요?
탄산음료_ 우리 정부의 찌질함을 옹호하는 쪽으로 배웠었죠.(웃음)

 

 
 

 


어른들의 정치 이야기

사회자_ 사실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할 때보다는 어른들과 대화할 때 더 많은 갈등을 경험하지 않나요?
부침개_ 나이 드신 분들은 정치적 성향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반면 젊은이들은 정치적 성향도 자기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여기고요.
식초절임_ 우리 외할아버지는 1? 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오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워하셨어요. 할아버지는 가족을 금방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서 평생 한이 남으신 거죠. 공산주의 하면 치를 떠셨어요.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려고 중국도 가셨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중국에서 못 만나게 되셨어요. 그 상심이 무척 크셨는지 그곳에서 쓰러져서 돌아가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아버지가 참 불쌍하죠.
부침개_ 저희 할아버지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참 싫어하셨어요. 중학교 즈음 학교에서 국사를 배웠는데, 제가 보기에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정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거예요. 할아버지께 가서 “김대중이 그중에서 제일 나은 것 같죠?”라고 했더니 할아버지께서 “걔가 제일 나쁜 놈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식초절임_ 친척들이 대구에 많은데요, 어른들이 모이면 새누리당 욕을 실컷 하시거든요? 그런데 결론은 꼭 “그래도 새누리야”로 가요. 그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부침개_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셔서 40대부터 70대까지 어른들을 자주 봬요. 그분들에게 정치적 의식이 없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게 되죠. 특히 세월호 같은 큰 사건이 터지면 그 일에 대해 숙고하게 될 것 같은데, 전혀 그러신 것 같지 않았어요. 명절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다 경기도 사람들인데, ‘빨갱이들’을 왜 그렇게 싫어하나 싶어요.
식초절임_ 저도 그런 게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거칠게 말하면 평균이고,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걸 이해하게 되는 부분도 생기네요.
부침개_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숙고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요. 부모님은 장난삼아 “미안해. 우리가 빨리 세상을 떠야지” 이런 말씀도 하세요.(웃음) 전라도 사람들은 다 사기꾼 취급하시고 말이죠.
탄산음료_ 우리 아버지도 그래요. 정당 투표는 노동당에 하시는데 전라도를 유난히 싫어하시죠.

 


얼굴붉힘관리, 교육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사회자_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를 할 방법이 있다면 뭘까요?
식초절임_ 정치적 토론을 할 때의 나는 사회 속의 나고, 저 사람이 나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나의 공적인 입장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내가 구분이 안 되면 화가 나는 거죠. 공적인 나와 사적인 내가 분리되려면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나아가서 정치교육, 인권교육,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방법 같은 것들도 교육하고요.
부침개_ 투표하는 방법도 교육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선거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재선거는 뭐고 보궐선거는 뭐다, 이런 거요.
식초절임_ 맞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게 ‘국영수’보다 중요한 것 같은데, 잘 안 해요.
부침개_ 정치도 그렇지만, 말을 많이 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서로 반대 입장에 서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요. 제가 초등학생 때 했던 토론은 주제도 선생님이 정해 주고, 방식도 꼭 이쪽 분단은 찬성, 저쪽 분단은 반대하라는 식이었어요.
탄산음료_ 맞아요. 또 토론 주제도 꼭 모범답안이 정해진 걸로 해요.
부침개_ 선생이 승패를 정해 주거나 답을 알려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거기서 끝냈으면 좋겠어요.
식초절임_ 맞아요. 교육에는 정답이란 게 없잖아요.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거니까요. 전 초등학교 때 어떤 주장을 했더니 선생님이 그게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엄청 창피했어요. 말해야겠다는 의욕이 팍 꺾여요. 그런 식으로 하면 어렸을 때부터 교실에서도 궁금한 게 있어도 아이들이 손들고 질문하기를 꺼리게 되고, 나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돼요.
부침개_ 토론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잖아요. 꼭 하나의 결말을 내고,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지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4.13 제20대 총선을 이야기하다

사회자_ 다들 어제 있었던 총선은 어떻게 보셨나요?
부침개_ 한 마디로, 기분이 좋았어요. 원래는 (야당이) 진 줄 알고 우울해서 아침에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는데, TV를 보니까 여소야대더라고요. 어쨌든 잘 됐죠 뭐.(웃음)
식초절임_ 그런데 이건 새누리가 실정을 했기 때문이지 더민주가 잘해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민주가 선거에서 이기긴 했지만, 진지하게 당의 명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큰 위기인 것 같고, 국민의당은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했으면 하고, 지켜봐야 할 것 같고요.
탄산음료_ 저는 조금 다른 데에서 긍정적으로 봤던 게, 대구에서 김부겸이 민주당 깃발을 꽂았거든요. TK 한복판에 말이죠. 반면 전라에서도 새누리가 깃발을 꽂았어요. 노무현이 부산에서 하려고 했던 지역주의 타파를, 두드리고 두드려서 금 요만큼 냈던 그 가능성이 이번에 조금 더 커지지 않았나 싶어요.
식초절임_ 어젯밤이 박근혜 대통령도 책상 많이 쳤을 거예요. 배신의 정치라면서 말이에요.
탄산음료_ 본인은 국민들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라고 하면서요.
부침개_ 대통령 본인이 생각하는 ‘국민’의 정의가 남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이번 선거 이야기로 돌아가면, 실제로 숙고하지 않고 정치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럼 저 사람들을 잡기 위해 야당이 해야 하는 행동이 뭐지 싶기도 하고요. 저렇게 감각적으로 투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식초절임_ 앞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투표할 거예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라는 게 나와 같은 의미가 아니더라고요.

 


나에게 정치란 OOO이다

사회자_ 그럼,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정치란 뭐죠?
식초절임_ 저는 가장 개인적인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연구공간이 부족해서 불편하다. 이건 매우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잖아요. 의자 하나 들여놓으려고 해도 돈이 들고요. 이런 일상의 수준까지 정치가 내려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필요한 것을, 나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입장을 이해하고, 얼굴 붉히기보다는 타협하면서 조화할 수 있는 게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이에요.
사회자_ 탄산음료 님이 생각하는 정치란?
탄산음료_ 이거 무슨 라디오스타 같은데?(웃음) 제게 정치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예요. 정치하는 사람들의 행동들, 그 이면의 심리들을 보면 정말 재밌거든요. 지금 안철수가 어떤 기분일까. 박근혜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마치 <삼국지연의>를 재밌게 읽는 사람처럼요. 저는 정치에 관심을 둔다기보다는 정치에 대해 알기 시작하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알게 된 게 고2 때 인터넷을 시작하면서부터였거든요. PC통신 끝물, 검열되지 않지만 정제된 인터넷 세계에서 우리나라 정치가 해방 이후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재미있게 익혔죠. 그렇게 시작해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하루의 정치가 너무 재미있어요. 김무성이 ‘옥새’ 들고 튄 것도 그렇고요.(일동 웃음)
식초절임_ 맞아요. 그게 이번 총선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같아요.
부침개_ 저는 저희 아파트 동에서 엘리베이터 승강기 유지비를 인상했을 때 삶이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 집이 1층 살아요. 그런데 승강기 유지비가 오른다고 돈을 더 내라는 거예요. 저희 집은 10년을 살면서 승강기를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그것에 대해 항의를 했는데, 반영되지 않았어요. 아마 입주자대표들은 우리를 서류상의 존재로 생각했을 거예요. 일상의 이런 작은 것들이 곧 정치인데, 그만큼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당장 내가 손해를 보니까요.
식초절임_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적’은 의도가 있다는 말로 쓰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봐요. 정치적이라는 말을 두려워하거나 거기에 입혀진 부정적 뉘앙스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정치란 과연 무엇인지, 나에게 정치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게 ‘얼굴 붉히지 않고 정치 이야기하기’의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탄산음료_ 아름다운 결론이네요.


이번 ‘판’에서는 20대와 30대에 걸친 대학원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고, 자연히 “얼굴 붉히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보다 다양한 연령대와 가치관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언성을 높여 가며 삿대질을 하는 낯선 상황이 펼쳐졌을 때 얻게 되는 교훈이 보다 ‘현실적’이고, 그렇기에 더 값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누구나 낯선 상황, 낯선 감정을 대면하면 얼굴을 붉히게 된다. 얼굴 붉힘은 곧 낯섦의 심리적 표지다. 그리고 앞선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정치’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상을 붙들고 있는 사회적인 논리가 곧 정치다. 우리가 정치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는 것은, 정치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 이야기하기’라는 행위가 낯설기 때문이다. 정치 이야기를 영원한 금기의 영역에 남겨 둘 것인지, 그 빗장을 열고 들어갈 것인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정리 김대현 편집위원│chris30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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