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윤원화 옮김,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

[지금 이 책!]


이 코너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시의적인 학술주제를 가진 서적을 소개해 여러 분야의 연구동향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독일에서 출간 된지 30년 만에 번역 출간된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기록시스템 1800·1900>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매체이론의 지평을 확대하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지음, 윤원화 옮김,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 -


유현주 /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학문 세계의 기념비적인 고전들 중에서는 전공자가 보기에 결코 쉽게 번역되지 못할 것 같은 책들이 있다. 그 책이 가지는 학문적인 의의가 크고, 관련 연구자들이 그 책의 번역을 시급하다고 여길수록, 번역에 착수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이번에 국내에 출판된 독일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기록시스템 1800·1900>(1985)이 바로 그런 책이다. 세계 매체이론의 지평을 확장하고, 그 중심축을 영미의 실용주의 매체이론으로부터 유럽 중심의 매체철학으로 바꾸어 놓은 책이자, 수많은 신진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키틀러 유겐트’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바로 그 책. 독문학자로 출발한 키틀러가 매체학자로서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전환점이 된 저작답게, 이 책의 분야는 문예학에서부터 매체철학의 영역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으며, 미학, 예술사, 과학사, 생활사, 문화인류학, 정신분석학, 정보통신이론 등의 경유지를 자유롭게 횡단한다. (이 책의 번역에 일군의 전문가 그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방대한 분량과 다채로운 내용의 골자를 뽑아보자면, 아마도 캐나다 학파로부터 시작되어 현대 매체이론가들의 파토스가 된 작업인, 각 시대의 주도매체로 인류사를 재편성하고자 하는 시도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매체이론가와 구별되는 키틀러의 급진성은 그가 ‘문자’ 이전의 매체는 아예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키틀러에게 최초의 매체는 문자다. 그는 매체를 “정보의 저장, 전달, 처리과정”으로 정의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매체의 기능은 ‘저장’이다. 따라서 발화되자마자 사라지는 언어는 키틀러에게 한 번도 매체로 간주된 적이 없으며, 그가 구성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문자와 문자 이후로 역사가 나누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는 두 단계의 역사 단위가 중심이 된다. 바로 문자매체 시대인 ‘기록체계 1800’과 최초의 기술매체 시대인 ‘기록체계 1900’이다. 키틀러가 ‘기록체계 1800’(정확히 보자면 1785-1815)이라고 명명한 시대는 다름 아닌 문자 중심의 낭만주의 시대로서, 이 시기의 기록양식은 ‘어머니의 발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당시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가족모델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확대되었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문자의 읽기와 쓰기라는 최초의 교육을 담당했던 것이다. 읽기를 가르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이들이 문자와 함께 듣는 최초의 소리로서 근원적 소리의 상징이 되며, 문자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성장해서 독서를 할 때 문자 속에서 어머니라는 영혼의 목소리를 기억하게 된다. 이것은 글을 쓰는 남성 작가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이들이 쓰는 글은 애정 어린 어머니의 목소리로 상기되는 내면의 소리에 대한 기록이다. 이처럼 ‘기록체계 1800’은 문자가 자의적인 기호가 아닌 어머니 혹은 자연에서 비롯된 초월적인 기의를 담고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하고 있으며, 기록되는 것은 보편적인 가치들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의 시작을 전후로 급변하게 된다. 이제 문자의 독점이 깨지고, 빛과 소리를 각각 따로 저장하는 방식들이 기록체계를 새로이 구성한다. 이것이 20세기의 지배적인 문화적 기록양식인 영화와 축음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록체계 1900’(1885-1915)은 이전 세기 낭만주의 패러다임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 예술에서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시문학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전달하고 있는 문자라는 매체의 물질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자는 공간적으로 재배치되어 자기 자신의 물질성에 몰두하게 되며, 자연과의 연관성 안에서 실재를 포착하거나 상상을 통해 환영을 만들어 내는 임무는 다른 기술매체, 즉 축음기와 영화에게 내어주게 된다. 이러한 ‘기록체계 1900’을 보다 상세히, 그리고 다분히 대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에 뒤이어 나온 <축음기, 영화, 타자기>(1986)이다.


놀랍게도 전문가 그룹이 아닌, 단독으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책의 번역을 해낸 이는, 키틀러의 훔볼트 대학 강의록 <광학적 미디어>를 번역했던 번역전문가 윤원화 씨다. 언제나처럼 꼼꼼하고 깔끔한 번역이 매우 돋보인다. 특히, 영어번역본으로 작업했던 <광학적 미디어> 때와 달리, 이번 <기록시스템 1800·1900>은 독일어 원본을 중심으로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영어판이 원본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많이 풀어쓴 까닭에, 원본에서 볼 수 있는 키틀러 특유의 언어적 난해함과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고집스러운 오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런 부분에서는 영어판을 많이 참조했음이 분명한 한국어판에서도 동일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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