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한국사회의 종교 지형 ② 불교 정신과 한국 사회

인간은 종교적 동물(homo religiosus)이라고 할 만큼 역사적으로 종교가 없는 시대가 없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인구의 절반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본 기획에서는 종교가 한국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 한국 종교의 정신적 가치와 사회·문화적 현상과의 관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21세기 한국 사회와 물질화된 한국불교

 

우희종 /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한국사회의 종교지형이라는 기획은 21세기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묻고 있고, 동시에 우리사회에서의 의미를 묻는다. 일반 독자를 전제하기에 불교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서술로 시작한다.
불교는 2천5백 년 전, 인도에서 진리의 깨달음(悟)을 얻은 ‘깨어있는 이(覺者, 부처)’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펼쳐지고 어느 것 하나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연기실상의 지혜를 강조하며, 이로부터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라는 기본 가르침이 성립한다. 삶에서는 지혜를 위한 수행과 이웃의 고통을 함께 하는 자비의 자세가 요구된다.
쉽게 말하면, 감각기관에 의거해 형성된 인간의 인식체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런 불완전한 인식 속에 자신과 대상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생겨나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렇게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세상의 상호의존성을 통찰함으로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여전히 어리석음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을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연기실상의 가르침은 삶 속에서 서로가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말한다. 다만 불교는 힌두교 전통 속에서 등장했기에 업(karma)과 윤회의 개념을 담고 있으나, 세상만물의 근본 실체를 인정하는 힌두교와는 달리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불교는 고정된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기때문에 배격하지만(불상은 종교적 요구에 의해 후대에 등장했다) 동시에 인격화된 진리로서의 하느님을 전제하는 기독교와도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초기불교와 그 후 관념적으로 전개된 부파불교, 이를 극복하려는 실천적 대승불교로 나뉜다. 지혜와 자비라는 가르침은 같지만 초기불교는 진리에 대한 개인 깨달음의 깨어있음을 강조하고, 대승불교는 깨달음이란 갈등과 고통의 바다인 일반사회 현장으로 되돌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실천적 행위로 완성됨을 강조한다.
한편,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직관적 참선수행에 근거하는 선종(禪宗)인 조계종으로 대표된다. 선종은 자타불이의 연기실상에 근거해 부처와 중생이 서로 다르지 않은, 삶과 진리의 일상성과 통합성을 강조한다.

한국불교의 현주소


고려 말 권력과 야합해 너무도 타락했던 불교는 1392년 조선개국과 더불어 국가 탄압을 받게 되고 급기야 승려들은 백정이나 노비와 같은 8대 천민 중의 하나로 격하된다. 한양 사대문 안으로 들어 올 수도 없었다. 그 후 일제 강점기의 불교는 일본 대처승 제도를 따르고 친일 행적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해방 후 정치권력 개입 속에 정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독신승 간의 절 뺏기 싸움이 지속되었고, 다행히 1970년대 성철스님의 봉암사 결사운동의 결실로 인해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었다. 더불어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에 따라 사찰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문화재 관리 명목으로 사찰입장료 및 국가지원이 동시에 이뤄짐으로 인해 한국불교는 고려 말 이후 7백 년 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불행히도 이런 물질적 풍요는 21세기 한국불교 타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는 승려의 절제된 생활과 이타적 삶의 자세를 낯설게 만들고, 세속 욕망을 추구하며 이를 숨기려는 승려들을 양산하게 된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승려들의 단체 도박사건은 물론, 사찰 땅을 팔아먹고 도박에 탕진하거나 해외로 도피하는가 하면, 주요 사찰 주지 직을 위한 계파싸움과 돈 선거가 만연한다. 최근에는 방장이라는 불교계의 상징적 자리마저 돈으로 선거가 이뤄진다.
종교집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고지원금의 불투명한 집행과 주지에 의한 횡령도 많다. 독신이어야 하는 승려에게 숨겨 놓은 처와 가족 의혹이 있고, 심지어 결혼 증명서까지 있는 승려가 버젓이 승적을 두고 있는 종단의 정신적 해이는 최근 동국대에서 재학생이 50여 일을 단식 투쟁하는 사태마저 불러왔다.
논문 표절의혹이 있는 승려가 종단 개입으로 총장이 되고, 오히려 이를 지적한 학생과 교직원을 사법처리로 몰고 가고 있다. 이처럼 자정능력이 없는 조계종단이 비판적 언론과 신도단체마저 해종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부패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들은 타락한 승려를 징계하기는커녕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해서 권력 유지에 활용하고 있기에 상황 개선은 더욱 어렵다.

내면화된 자본주의와 불교의 자정능력


진정한 종교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의 능동적 전환 내지 주체적 도약을 요구한다. 그 점에서 자타불이와 동체대비라는 불교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가르침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하기에 매우 사회 참여적 종교다. 결코 나 하나의 이기적 삶이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탈속적 자세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며 승려에 대한 굴종의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불교와 달리 해외에서 다양한 형태의 참여불교가 활발히 전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헬조선’에 지친 많은 이들, 혹은 대안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올바른 종교의 역할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개인의 깨달음만을 내세워 사회문제마저 개인화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건강한 사회 비판 정신을 지우고 왜곡된 사회구조를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어느 승려는 한국사회에서의 승려가 사회의 정신적 사표라기보다는 이른바 ‘사찰관리인’이며 ‘불교자본가’라고 공언했다. 한국불교는 종교라는 브랜드에 깨달음이라는 상품을 내세운 일반사회의 다단계 사기업체인 셈이다. 사회나 종단 문제를 개인화시킴으로써 승려의 기득권과 물질적 안정을 꾀하며 건강한 사회발전에 장애물이 된 한국불교는 더 이상 대승불교가 아니라 승려집단의 기업으로 전락한 왜곡된 불교다.
물질주의에 빠져 자정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한국불교에 대한 우려 속에 일부 깨어있는 신자들은 바른 불교 세우기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7백 년 이래의 물질적 풍요 속에 그 어느 때보다도 위선에 찬 모습으로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자체적으로 바른 가르침을 되찾아, 내면화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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