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기 /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과정 수료

과학스크린 ① 영화 <프로메테우스>와 인류의 근원

본 기획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학’분야의 학술적인 주제들을 고민해 보고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철학, 인문’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도록 그 의미를 확대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과학 철학사의 오랜 논쟁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흐름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과학 철학사의 논쟁: 진화론 vs. 창조론


허원기 /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과정 수료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던 엘리자베스 쇼와 찰리 할러웨이는 여러 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당시 능력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별자리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를 외계 지성체, ‘엔지니어’의 초대장이라고 여긴 그들은 탐사대를 조직하여 인류의 기원을 찾아 그 별자리로 떠난다.

2년이 넘는 항해 끝에 탐사대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행성 LV-223에 도착한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끝에 그들은 마침내 동면 중인 엔지니어를 찾아 깨운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지구상의 인류를 모두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엔지니어의 시도를 저지하지만, 탐사대는 단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전멸한다. 존재의 기원을 알기 위해 시작했던 탐사가 존재의 파멸로 끝난 것이다. 영화평을 보면 많은 관객이 영화를 통해 생명의 진화와 창조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한 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지적 탐구가 우리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가는지를 탐사대의 전멸로 보여준다. 더 알려고 하지 말고 모르는 채로 있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걸까? 판도라의 상자를 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탐구 욕망이라는 판도라 상자

창조론의 추동력 중 하나는 우리 기원을 탐구하는 데 느끼는 공포이다. 기원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금기를 깨는 행동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감히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했다가 창조자에 의해 파멸 당한다.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의 핵심에는 과학이 어떤 종류의 금기를 깨트리려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창조론은 기원에 관한 탐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한다. 기원의 문제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접근할 수도 없고 시험할 수도 없는 문제라고 말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점성술과 같은 사이비 과학 이론과 과학 이론의 핵심적인 차이를 이론이 내놓는 경험적 귀결의 반증 가능성에서 찾는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대담한 추측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제대로 된 시험에 의해 논박될 가능성이 있다. 시험에 의해 이론이 논박되면 이론은 거부된다.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이론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포퍼는 과학자가 기존 이론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는 시험을 끊임없이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시험을 끊임없이 고안할 수 있게 만드는 이론이 좋은 과학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은 이러한 시험을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이 왜 그렇게 정교한가?”라는 질문에 창조론자는 “지적인 설계자가 목적에 맞게 최적화했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그 이상의 질문, “그 지적인 설계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혹은 “지적 설계자가 설계했다는 증거는?”과 같은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며, 매우 불경한 질문이다. 즉 창조론이 제공하는 대답을 근본적으로 시험하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창조론에서 상정하는 지적 설계자는 엔지니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롭고 인류를 사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편안하게 쉬면 된다. 그러나 포퍼에 따르면 지식 탐구는 안전한 항구 깊숙한 곳이 아니라 폭풍과 파도 속에서 행해진다.

영화 속 엔지니어 설계론(엔지니어론)은 LV-223에 엔지니어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시험 가능한 대담한 추측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현실 창조론과는 차이를 보인다. LV-223에 생명흔적이 없었어도 주인공들이 엔지니어론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이론을 대폭 수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어떤가?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개념을 제시했을 때, 다윈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연선택을 통해 현재와 같은 생물 종이 나타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였다. 문제는 필요한 시간이 당시 알려져 있던 지구의 나이보다 상당히 길다는 데 있었다. 포퍼 식으로 말하면 다윈은 시험 가능한 매우 대담한 추측을 한 것이다. 당대에 이름난 물리학자 켈빈은 뜨거웠던 지구가 점점 식어간다는 가정 하에 지구의 나이를 2천만 년 정도로 추산하였다.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이 수치는 틀렸다. 켈빈은 지구 내 방사성 원소 붕괴로 인한 열 발생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진화 이론이 지속적인 질문과 시험을 허용하고, 그를 위한 대담한 추측을 계속 제시한다는 점이다. 진화론은 우리가 가진 정교한 눈이 일관된 설계가 아닌 자연선택이라 불리는 잇따른 땜질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 눈은 빛을 감지하는 시세포가 빛이 들어오는 반대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어 구조상 매우 비효율적이다. 덧붙여 자연계에는 20여 개가 넘는 다른 방식의 눈 설계가 있다. 다양하고 이상한 구조를 지닌 눈은 눈의 발달이 합리적인 설계가 아닌 주변 조건에 영향을 받는 땜질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것이 진화론에 대한 시험이다. 시험에는 금기가 없다. 진화론은 논박될 가능성을 언제나 허용한다. 이 추측과 논박의 과정에서 지식은 성장한다.


과학의 조건, ‘퍼즐풀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은 이들은 이러한 생각에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각각의 세계에서 잘 작동하지만 같은 기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고 과학과 사이비 과학이라는 포퍼식의 구분은 온당치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쿤 역시 포퍼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자신의 기준을 제시한다. 쿤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정상과학의 퍼즐풀이 전통이야말로 과학의 핵심적 특징이라 말한다. 패러다임은 매우 인상적인 성과를 내지만,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즉각적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제공하는 것은 다양한 문제들을 패러다임의 안내에 따라 풀 수 있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퍼즐이며, 퍼즐풀이의 과정에서 해당 연구전통은 건설적인 것이 된다.

어떤 진화생물학자의 진화적 설명이나 예측이 실패했다면, 그러한 실패는 그에게 해결해야 할 퍼즐이 된다. 자료상 결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예전 관찰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관찰을 시도할 수도 있다. 혹은 새로운 보조 이론들을 도입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전학의 발달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여기서 아직 풀리지 않은 퍼즐들을 잘 풀어내는 이는 연구 공동체 내에서 능력 있는 과학자로 칭송받는다. 만약 그가 퍼즐풀이에 실패한다면, 공동체는 패러다임을 비난하지 않으며, 그 과학자의 무능력을 비난한다. 그렇기에 진화생물학이라는 연구 전통 내에 있는 과학자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공동체의 인정을 받으려고 퍼즐풀이에 매진하고 퍼즐을 세련되게 풀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한다. 자연스레 수많은 퍼즐은 진화생물학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데 이용된다.

반면 창조론에는 이러한 퍼즐이 없다. 인간의 눈이 매우 비효율적으로 설계된 것은 ‘지적’ 설계자가 있다고 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이를 퍼즐이라 여기지 않는다. 지적 설계자의 고상한 의도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엄청난 복잡성을 설계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복잡성을 설계했을 설계자의 복잡성에는 침묵한다. 다시 말해 창조론자는 실제로 관찰되는 여러 생물학적 현상들을 설명하거나 예측하는 데 실패했어도 공동체의 비난을 피한다. 난점들의 해결은 개별 창조론자가 가진 지식과 능력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능력과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우며 인간의 역량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누가 개별 창조론자들의 실패에 책임을 묻겠는가? 수많은 실패는 창조론의 연구 전통을 발전시키고 개혁하기 위한 시도로 활용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실제로 어떤 지적 설계자가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을 창조했다고 할지라도 창조론은 과학이 되지 못할 것이다.

현실 창조론과 달리 영화 속 엔지니어론은 엔지니어의 의도, 기원, 능력과 같은 해결해야 할 질문들을 다양하게 제기한다. 특히 직접적인 통제 없이 어떻게 지구에서 자신과 똑같은 DNA를 가진 생물을 나타나게 만들었는지 해명하는 작업은 엔지니어론의 중요한 퍼즐이다. 엔지니어론의 안내 아래 이 퍼즐들을 풀어나간다면, ‘쿤’적인 과학전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는 그러한 다양한 퍼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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