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 감신대 종교철학과 교수

한국사회의 종교 지형 ① 종교와 사회


인간은 종교적 동물(homo religiosus)이라고 할 만큼 역사적으로 종교가 없는 시대가 없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인구의 절반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본 기획에서는 종교가 한국 사회에 끼쳤던 영향에 대해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고, 한국 종교의 정신적 가치와 사회·문화적 현상과의 관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종교와 사회, 그 관계를 논하다

 

이정배 / 감신대 종교철학과 교수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 중 오히려 후자의 강세로 위험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교종(敎宗)이 말했듯 ‘다리’를 놓는 것이 종교의 역할임에도 오히려 서로 ‘장벽’을 쌓았던 결과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 간 갈등에 처한 사회해체, 이것이 이 땅에 만연한 위기의 일면이라 여겨도 좋겠다. 그럴수록 종교 간 대화와 소통이 사회 안정을 위한 전제라 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안주한 종교가 자신들 안팎에서 불평등을 심화시킨 것도 걱정이다. 그 역이 되어야 함에도 자본주의가 종교를 자본주의화 시켰던 결과였다.

상호 의존적 관계의 종교

본래 종교의 발생은 무엇보다 풍토 내지 환경과 관계가 깊다. 문명 발생지가 종교가 생겨난 곳이며 저마다 특색 있는 풍토를 배경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인도 문명에서 힌두교, 불교가 태동하였고 몬순기후가 이들 종교의 성격을 규정했다. 몬순 풍토는 인간에게 자연의 어마어마한 혜택(은총)을 선사했다. 인간의 큰 노력 없이도 자연이 넉넉한 삶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연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폐해를 주기도 했다. 엄청난 해일과 태풍 앞에서 인간의 삶은 무기력해진다. 이렇듯 자연의 큰 위력 앞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방식은 수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용적 인간 이해로부터 생겨난 종교적 표상이 업(業)이나 연기(緣起)와 같은 것들이며 힌두교와 불교는 그의 구체적 형식들이다.

반면 사막 풍토에서 생겨난 문명과 종교들도 있다. 몬순과 달리 사막은 인간이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풍토라 할 것이다. 자연의 은총적 성격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척박한 곳이 바로 사막이다. 하지만 이런 풍토 하에서도 문명과 종교는 발생했다. 이곳, 사막 풍토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방식은 의지적이어야만 했다. 그것도 개인의 의지만이 아닌 집단적 의지가 중요했다. 자연과 맞서 생존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인간 의지와 관계하는 초자연적 신관(神觀)을 발생시켰다. 히브리적 풍토에서 생겨난 기독교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종교가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렇듯 종교들이 풍토와 관계된 인간의 자기이해로부터 비롯한 것이었기에 사실 그들 사이에 옳고 그름을 묻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정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종교와 문명(세계관)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서 불이(不二)적 상태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란 말은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봄’의 뜻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근대 이후 서구적 영향 탓에 마루 종(宗)자로 번역되면서 으뜸가는 교리, 최고(上)의 가르침이 되었고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는 요인을 제공했다. 이런 이유로 제각기 종교들은 타자 부정적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려 했고 이로써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발달시켜 현실 사회에 큰 누(累)를 끼치고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자 부정적 종교성을 지닌 대표적 경우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이 어원에 있어 전체(wholeness)와 같다는 점 역시도 크게 유념해야 옳다. 자타(自他)가 불이(不二)적 관계가 될 때 비로소 구원이라는 종교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물리학자 바이젝커는 세상 속 빈자(貧者), 핵의 과다보유, 생태계의 파괴가 지속되는 한 종교가 말하는 구원은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사회 종교의 현주소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7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교세의 크기 여하를 막론하고 대등한 위치를 점하며 형식적이기는 하나 연합 기구를 조직한 상태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와 기독교라 할 것이며 유교 역시 체화된 보편 문화로서 한국인의 심성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종교는 자신들의 출생지에서 필요 막급한 절대적 영성을 공급했었다. 하지만 시공간을 달리한 현실에서 이들 종교의 역기능이 순기능을 대체하고 있다. 주지하듯 의지적 인간 이해와 초자연적 신관에 근거한 기독교적 종교성은 서구 근대화를 추동했다. 자본주의 탄생을 도왔고 전 자연을 탈(脫) 주술화 시킨 유일한 종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초월성은 배타적 절대성의 에토스(ethos)를 통해 사회 통합을 해치고 있다. 기독교가 종교 본유의 관계성을 깨뜨리고 유아독존의 길을 걸었던 탓이다. 신앙과 교리로 무장된 인간 의지 역시 타자 부정적 경향성을 띠고 있기에 약보다 독이 될 여지가 많다.

근대화 과정에서 다소 소외된 불교는 탈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일체를 연기로 보는 ‘자이이타(自利利他)’의 종교로서 불교가 과학이 밝혀놓은 유기체적 세계관과 공명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생태위기의 극복 지혜를 불교로부터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 불교는 업과 연기의 세계관적 지혜를 살리지 못한 채 역사 망각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숙명, 체념 그리고 기복적 종교성에 안주한 결과라 할 것이다. 유교 역시 자신의 전근대성을 벗는 치열한 노력이 없기에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이미지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상태이다.


자본주의 병폐 속 종교의 역할

종교가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된 핵심 이유 중 큰 하나는 돈의 힘에 굴복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실상 어느 종교도 예외 없이 그리되었다. “물질이 개벽하였으니 정신을 개벽하자”(원불교)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현실 교회는 여전히 물질주의, 자본의 힘에 자신의 정신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종교의 형식은 여러 가지이나 그 본질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말, ‘몸을 줄이고 마음(정신)을 크게 하는 일’에 있어 공통적이다. 사후 및 피안의 세계를 말하기 전에 세상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에 온 힘을 쏟아야 옳다. 따라서 종교들은 분배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사회 내 그늘을 거두는 일에 힘을 합쳐야 마땅하다. 계급/신분론을 고착화시키는 자본주의 병폐와의 싸움을 모든 종교가 공통의 과제로 여겨 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종교 창시자들의 정신이자 종교가 생겨난 이유인 까닭이다.

어느 신학자가 말했듯 각 종교가 말하는 바른 가르침(正敎)은 바른 실천(正行)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자신들 교리에 따른 정행의 삶을 위해 종교들 간의 선한 경쟁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것을 바로 사랑의 빚만 지라는 성서의 본뜻이라 여겨도 좋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사회 내 벽을 만드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한다. 오히려 무신론적 과학, 사회생물학적 진화론의 도전 앞에서 종교는 공히 정신(영혼)의 가치와 의미를 치열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종교 자체가 시대에 적합한 언어로 재구성될 때 종교가 사회를 구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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