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연 / 심리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보낸 편지]

배움의 길과 삶의 길

정태연 / 심리학과 교수

배운다는 것은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머리나 몸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배운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때 두 대상의 연결과 분리는 보는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분리는 연결에 비해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연결은 더 추상적인 차원의 인식이다. 그래서 분리는 더 포괄적인 연결 안에 존재하는 하위 차원의 인식이다. 가령 나와 너는 생김새라는 구체적 차원에서는 다르지만 생명체라는 좀 더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연결된 존재다.

두 대상을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작업은 그 대상의 특성에 기초한다. 또한 이 작업은 우리가 발달하면서 구체적인 차원에서 추상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가령 우리는 산과 물의 차이를 그 색깔에서 찾다가 나중에서는 그들의 속성에서도 찾는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대상들을 추상적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뜻이나 기능으로 서로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배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배운다는 것은 분리과정을 통해 어떤 대상이 갖는 보이지 않는 특성을 발견하고 궁극적으로는 연결과정을 통해 그것을 다른 대상과 결합하는 작업이다.

연결과정을 통한 배움은 우리를 ‘지금-여기’에서 해방시킨다. 배움을 통해 ‘지금’은 과거의 시간으로 확산되어, 멀고 먼 태초의 시간까지도 이 순간 우리의 존재와 연결된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우리는 역사와 하나가 된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미래의 시간과도 하나가 된다. 존재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먼 미래도 지금의 우리와 연결된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여기’를 과거의 공간과 연결할 수 있다. 존재가 있기 시작한 그 처음의 공간도 지금의 공간과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 또한 미래의 공간도 여기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배움을 통해 우주를 여기로 가지고 올 수 있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배움 때문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즉 지금 여기에 없는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나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온전히 느끼거나 감상하거나 혹은 그들과 소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배움은 지금 여기와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즉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순진한 아이나 깨달은 랍비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지만 랍비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있다.

잘못된 배움은 우리를 더 구속할 수도 있다. 서툰 배움 또한 우리를 힘겹게 만든다. 배우지 못하면 지금 여기에 갇혀 있게 되지만 배우면 자신을 배운 것에 가두어 둠으로써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와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을 하나로 통합할 때 온전한 배움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배움의 진정한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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