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 / 숭실대 철학과 교수

 

[학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형성하는 여론의 가능성은 현대 사회사상가들에 의해 정립, 구체화되어 왔다. 이 지면에서는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론화한 '공론장' 개념을 빌어 오늘날 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정치에서의 말과 공론장

김선욱 / 숭실대 철학과 교수

얼마 전 노엄 촘스키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많이 퇴보했으니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시인 김지하가 신새벽에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썼던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사회에 참된 목소리가 잦아들고 지식인의 입에서 나와야 할 양심의 소리가 무뎌진 것을 보면 어쩌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절망적이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척도는 그 구성원들이 자기 생각을, 그것도 권력자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얼마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런 말은 누구나 듣고 볼 수 있는 공간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자체가 말로써 서로의 행위를 조정하자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공동으로 공동체의 삶을 함께 책임지고 꾸려가자는 이념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론장이 얼마나 제대로 기능하는가에 사실상 정치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공론장 개념의 탄생

공론 개념의 핵심을 형성하는 데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기여는 결정적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과 여러 글을 통해 공론장 개념, 소통적 권력 개념 등에 대해 아렌트에게서 힘입은 바가 많다고 했다. 이들의 활동시기가 조금 겹치기는 하지만 서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양자의 사상적 유사점 때문에 <한나 아렌트의 정치판단이론>에서 필자는 두 사람의 사상을 합치면 두 개의 사상이 아니라 1.5개의 사상이 된다고도 했고, 또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정치 이론을 전개했다고도 했다.

최초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렌트는 정치의 소멸이 초래하는 위험을 나치 독일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주었다. 나치의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두 축으로 삼고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잘 짜인 논리적 체계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는 거짓된 이론 체계이다. 유대인의 수용과 학살은 사회 전체에 공포를 조성하여 결국 모두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그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작동된 전체주의 체제에서 공론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전에 조금이나마 작동했던 공론장도 교묘한 방법을 통해 파괴되었다. 공론장 파괴의 첫 단계는 국회의 무력화였고, 둘째 단계는 여당의 무력화였다. 정치 시스템은 가동하지 않았고 오직 히틀러의 뜻에 절대복종하는 비밀 조직이 전체를 이끌어 갔다.

아렌트의 전체주의 분석은 역사적 과거에 관한 관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런 사태가 반복될 수 있기에, 전체주의의 요소들을 분석하여 우리에게 알리려 했던 것이다. 이를 오늘에 비추어보면, 한 편에는 물질만능주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있고, 또 다른 한 편에는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바로 굶어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이 있다. 우리 앞에도 이데올로기와 테러가 놓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는 경제로 환원된다. 경제 위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은 압박감에서 우리는 정부가 제시하는 특정한 정책에 할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경제주의, 공론장을 무력화하다

아렌트는 근대 이래로 공론장의 가장 큰 위협은 경제라고 한다. 경제는 오직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모두를 줄 세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을 향한 첫째 단계가 다양성의 표현이다. 말로 표현할 자유가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며 매체가 필요하고, 나아가 그런 생각을 모아 구조화하는 작업이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사회의 기본 모습이다. 이런 민주주의의 근본을 파괴하고 공론장을 무너뜨리며 침묵을 강요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 곧 돈에서 나온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상당히 자유로운 공론장이 열려 있다고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장에서 의견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것은 돈을 매개로 한 체계적인 기만 때문이다. 정치공학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여론조사와 PR을 통해 사람들에게 착시현상을 유도한다. 더 많은 돈이 투자될수록 더 정밀한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고 더 정교한 정치홍보가 이루어져 결국 사람들은 더욱 잘 속게 된다. 그 결과, 경제가 잘되어야 한다는 점에 모두의 동의를 얻어,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부를 극소수에게 집중시키는 정책에 찬성하게 한다.

여론조사와 정치홍보를 통한 기만은 돈의 힘을 통해 증폭된다. 월급 많이 받는 회사에 취직한 인재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B라는 정당을 지지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급하는 A 정당을 위해 기꺼이 일한다. 밤새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A 정당이 선거에서 압승해도, 그는 정치적 신념과 비즈니스는 별개라고 말한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에게 공론장은 참된 권력이 형성되는 유일한 장(場)이다. 권력은 사람들이 모여 말을 나누면서 형성된다. 그들이 나눈 말이 약속이 되고 그 약속을 기록한 것이 법이다. 개인의 정치적 자유는 법을 통해 제도화되어 영속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세상을 그 법이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법 개정 노력이 이루어지고, 또 시민 불복종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현실의 제도가 지나치게 강하게 변화에 저항할 때는 혁명이 발생한다. 말이 제대로 오가지 못하는 사회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행위의 목표이다.

 

합리적으로 소통하기 위하여

하버마스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말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적 행위의 조정 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처음에 그는 ‘이상적 대화 상황’이라는 개념을 세웠다가 나중에는 이 개념 자체를 버린다.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하지만, 그렇게 상정된 이상적 상황 자체가 사실상 이미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말이 가진 논리적 힘, 혹은 이성적 힘이 아닌 다른 어떠한 힘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 뒤, 소통의 과정을 분석한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적 대화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대단히 매력적이기 때문에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여전히 여기에 주목한다. 대화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점과 외적인 어떤 권위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이상적 대화 상황’ 개념을 통해 강조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소통은 ‘상호이해’로 귀결되어야 한다.

소통은 어떤 과정을 통해 상호이해에 도달하는가.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말 가운데 사실 차원의 점검이 문제가 되거나, 규범적 차원이 문제가 되거나, 혹은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이 문제가 될 때, 그 대화가 계속 진행될 수 없고 대화 내용의 일부에 집중하는 담론(discourse)이 시작된다. 담론의 과정이 서로가 만족할 만하게 끝나면 다시 대화가 진행된다.

담론의 과정에서 사실성이 문제가 되면 사실 확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의심이 없이 확인되어야 결국 거기에 대해 예, 아니오의 입장이 가능해진다. 또한 논의되는 내용이 이치에 맞고 사리에 맞아야 한다. 우리의 사회적 삶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에 근거해 진행된다. 대화의 내용 또한 그러한 가치를 확인하고 그 가치에 따라 평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화하는 자의 진실성도 문제다. 말하는 내용에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말하는 내용 자체가 진정으로 추구되는 바인지를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세 번째의 것은 확인이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도 과거의 말과 행위와의 일관성을 통해 점검할 가능성이 있고 또 약속을 통해 미래의 문제를 예방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상호 인정 가능한 수준에서 해결될 때 우리는 합리적으로 소통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공론장은 이와 같은 소통이 가능한 공간이어야 하며,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만 합리적 대화가 가능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하버마스는 생각한다. 만일 이런 대화가 애당초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공론장 자체를 새로이 열어내는, 즉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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