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2010 발화의 방식들

특집ㅣ침묵
1970-2010 발화의 방식들


발화의 징검다리를 건너

 

통‧블‧생

세계가 68혁명을 이야기하고 반전과 평화를 외칠 때, 대한민국은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을 찬양하며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를 갈급해 할 때, 서구사회는 이미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의 질서와 권위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했다. 68혁명과 우드스톡 페스티벌(1969)과 같은 서구 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에도 서구의 ‘스타일’을 앞세운 새로운 청년문화가 등장했다.

 
 

영어와 경상도 억양이 묘하게 섞인 한대수가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한 채 미국에서 돌아오고,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영화 <쎄시봉>으로 잘 알려진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은 통기타를 들고, 기존의 ‘뽕짝’과는 다른 세련된 노래를 불렀다. 군사독재와 산업화의 성과가 드러나던 시기, 4.19나 6.3항쟁을 겪어보지 못한 당시 청년들은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를 즐기는 소비주체로 떠올랐다. ‘통‧블‧생(통기타‧블루진‧생맥주)’이란 말로 표상된 이들은 기존에 보지 못한 ‘제스처’들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68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흐름으로 보였다. 군사독재가 불러온 휴교 조치 속에서 DJ가 있는 음악다방에서 팝송과 포크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은 암울한 정치에 맞서지 않고 낭만 속으로 도피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때문에 그 시대의 목소리가 ‘통‧블‧생’으로 대표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대학생들 외에 많은 젊은이들은 ‘포크송’보다는 남진과 나훈아에 열광했다. 그리고 동년배 대학언론에서도 ‘통‧블‧생’의 문화를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라고 부르며 서양문화를 향유하는 사치스런 행태로 여겨 비판했다.

 
 

그러나 ‘반공’을 이야기 하고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기존 세력에게 그들의 노래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들렸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인혁당 사건 이후 유신정권은 225곡의 가요를 퇴폐적 청년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이 ‘북쪽’을 상상하게 한다고 여겼는지 ‘아침이슬’은 금지곡이 되었고, 이 노래를 지은 가수 김민기는 입대를 했다. 월남전을 비판했던 서유석은 방송출연을 금지 당하고,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가수들이 대마초 단속을 통해 구속되면서 수많은 금지곡의 자리를 국가가 강요하는 ‘건전가요’로 대신하게 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한 TV 토크쇼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라는 청년 토론자의 질문에 “그렇게 안 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88학번인 그에게는 고도의 경제성장률 시기에 소설을 쓰며, “안 되면 취업하지”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게 당연했다고 한다. 낮에는 투쟁을 하고 밤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하는 대학생활에 익숙했던, 흔히 말하는 386세대들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지금보다 더 못 살았어도 경제의 위기가 개인의 위기를 불러오는 공포를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대학을 다닌다는 게 ‘잉여’가 되는 길이 아니었기에, 당시 대학생들은 ‘지식인’이라는 자각과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기꺼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 수 있었다. 물론, 3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난 80년대 학번을 가진 ‘대학생’만을 지칭하는 말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80년대는 국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민주화’를 이뤄낸 ‘공동의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80년대는 지속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난 시기였고, 그 절정은 ‘6월 항쟁’이었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고 민주헌법 쟁취를 투쟁하는 움직임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조작‧은폐를 규탄하는 대회가 이어졌다. 전국 24만여 명이 참가한 국민대항쟁기간이 이어지고 마침내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핵심으로 하는 6‧29선언으로 민주화쟁취를 실현한다. 특히, 6월 항쟁은 사무직 노동자, 중산층 등이 대거 참여하며 국민전체가 정권에 등을 돌렸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과중한 형량을 이유로 탈주한 인질범 지강헌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다 자살하고, ‘5공 비리’로 불리던 전두환 일가의 부정부패는 빈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부각시켰다. 88올림픽은 전쟁을 치르듯 국가적 동원령 아래서 준비되고, 정부는 서울 200여 곳 재개발 지역의 시민들을 이주시킨다. 국가의 대대적인 잔치였던 88올림픽에 모든 국민이 ‘손에 손잡고’를 부르며 흥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들어선 군부 출신 대통령은 올림픽과 선진국 문화를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했고, 3S(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은 가속화 된다.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 시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였다. 영화산업이 성장하고, 문화담론이 넘쳐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동구권이 몰락했으며, 김일성이 죽었다. 젊은이들은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이들은 시위를 통해 세상을 바꿔본 경험은 없지만 민주화 세대로부터 학습을 받고, 그 가치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에 접근하는 엄숙함과 권위는 거부했다. 또한 과거의 민주화 투쟁에 대한 부채의식과 냉전의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무겁고 촌스러운 시대적 요구에 대해서도 자유로웠다.
열사를 우러르진 않았지만 서태지가 우상인 시대였다. 고등학교 중퇴에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교실 이데아,1994)>,<내 맘이야(1994)>를 노래하는 서태지는 공부만을 강요당한 청소년들에게 힙합패션과 파격적인 춤을 전파시키고,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상상을 실현시켜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냥 가수가 아닌 90년대 ‘문화 아이콘’이었다.
서태지 등장 이후, ‘신세대’ ‘X세대’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던 젊은이들은 화려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으면서 정치‧사회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일상의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동체가 담고 있는 획일적인 세계관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으로도 보였다. 어른들에게는 이기적이고 버릇없는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개인의 자율성과 그에 대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는 데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신인류’였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에 문화 그 자체를 소비했다. 근대화를 위해 근검절약을 주장하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물질주의를 바탕으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고, 제품의 필요성보다 감성적 이미지에 열중하며 적극적인 소비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했다. 광고 시장에서는 “X세대를 잡아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청년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움직임은 1997년 외환위기(IMF)로 인해 좌절되었다. 삶은 고도성장기와는 달라졌고, 청년 실업률은 12%까지 올라가며, 1996년 대학설립 자율화로 늘어난 대졸자로 인해서 대학졸업장은 더 이상 취업의 보증서가 아니었다. ‘정치’와 ‘문화’의 시기가 가고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경제’의 시대, 출구 없는 21세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카가 쌓은 명박산성

1999년 외환위기(IMF)를 벗어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된 대한민국은 안정적인 경제와 안보를 바탕으로 21세기를 맞이했다. 또한 부딪혀 쟁취해낸 민주화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정권으로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갔다. 청년들은 더 용감해져 과감하게 정권을 욕하고 맞서 싸웠다. 더불어 말 할 수 있는 방법도 정보화 시대에 맞춰 발전했다. 인터넷을 통해 청년들의 행동은 빠르게 확장되고 전달됐다. 멀리 있는 누구라도 MB의 명박산성을 알게 되었고, MB가 쥐 그림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다. 청년의 발화는 다양해졌고, 그만큼 예측 불가능했다.
혁명과도 같은 인터넷의 등장과 모두가 일촌이 될 수 있는 싸이월드의 열풍 속에서 젊은이들의 창의력은 꽃을 피웠다. 게다가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린 2002년 월드컵도 창의력과 단합을 일으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같은 옷을 입고 함께 모여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르고 처음 보는 사람과 부둥켜안고 승리를 만끽했다. 모이는 공간은 축제의 장이 되었고, 인터넷에는 커뮤니티 사이트가 등장했다. 저마다의 말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글을 지키기 위해 짤방을 만들었다. 이들은 짤방을, 싸이월드를, 축제를 즐겼다. 청년들은 밀레니엄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위 그림도 바뀌었다. 70~80년대 격정의 민주화운동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시위를 축제라는 형태의 집회가 채웠다. 바로 2008년 촛불집회다. 청년들은 물대포를 쏘는 경찰에게 온수를 요구했고, 시민의 연행을 포돌이와 함께하는 무박 2일의 닭장차 서울투어라고 말했다. 예민하고 진지한 정권은 청년들의 재기발랄함에 거대한 바리게이트로 화답했다. 2층짜리 컨네이너로 대답한 MB의 단호박같은 답변은 2008년 서울에 ‘명박산성’이라는 랜드 마크를 탄생시켰다.
경제에는 88만원 세대가 있다. 88만원을 벌고 생활해야하는 청년들은 정치적 혹은 내면에 집중할 수 있던 과거 청년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 수는 있어 취업 걱정이라는 말이 낯설던 시대가 지났다. 이제 그야말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 놀고 또 노는 세상”이 등장한 것이다. 광화문에 모여 미친 소 OUT을 외치던 축제는 끝을 보이고, 취업 걱정을 하는 청년들은 하나둘씩 발걸음을 돌렸다. 닭장차 서울투어는 이제 끝이 났다.

노오력해도 안 되는 헬조선

신자유주의는 국가 간 무한 경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부의 양극화는 더욱 극단적인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은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생각되는 모습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잉여인간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되었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찌질함을 벗어나기 힘든 잉여들이다. 88만원 세대마저도 부러운 잉여세대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치명적이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말하는 청년에게 혹자는 청춘이기에 아픈 건 당연한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아프면 병원에 갈 환자들이지 어떻게 청춘이란 말인가. 멘토는 다시 꼰대가 되었고, 청년들의 잉여력은 더욱 증가했다. ‘노오력’ ‘헬조선’ ‘흙수저’ 등의 신조어는 유행하는 대중가요 속 가사처럼 “너와 나의 연결고리”이자 “우리 안의 소리”가 되었다.

 
 

청년들은 국가를 ‘헬조선’ 혹은 ‘불지옥반도’로 표현한다. 이런 청년들을 보며 사회는 노력의 간절함을 되묻는다. 간절하게 원하면 우주의 기운이 돕는다던데, 청년들이 간절하게 노력하지도 않은 채 헬조선을 말하는 건 아니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노동개혁을 반대하고 최저시급 인상을 위한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의 외침이 간절하지 않았는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덜 간절했다고 할 수 있을까. 청년들은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간절히 말했지만 그들에게 청년의 말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희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꼰대의 ‘답정너’ 앞에서 청년들은 결국 헬조선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일방적인 소통은 MB를 떠오르게 한다. 적어도 MB는 청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명박산성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지금 꼰대들은 청년의 말을 듣지 않는다. 심지어 듣지 않은 채 말만 하는 대통령의 발화는 ‘유체이탈 화법’이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다며 청년들은 번역기를 달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역사책을 읽으면 전체적으로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며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대통령의 느낌적인 느낌이 청년들에겐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소통 불가능한 (답답한)‘고구마’ 같은 현실에서 청년들은 말하려는 의욕을 잃어가는 듯 하다.
이 같은 답답한 현실은 ‘헬조선’을 만들어냈다. 이제 청년들의 말은 경제 즉, 먹고사는 것과 직결된 현실의 장벽 앞에서 ‘헬조선에 사는 흙수저’라는 자조적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어렵게 얻어낸 스펙과 졸업장으로 직업을 구해보려 ‘노오력’해보지만, 열정페이로 일하는 것도 고맙게 여기라는 갑질과 신입사원의 꼬리표를 떼기도 전에 회사에서는 희망퇴직을 권유 당한다. ‘고구마’로 막힌 목엔 ‘사이다’가 약이라지만 한국사회의 사이다는 좀처럼 찾기 힘든 현실이다.

 

김현진 편집위원|kim199801@naver.com
안혜숙 편집위원|ahs11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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