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쯔 / 완전변태 회원

퀴어의 현재: ④ 겁먹은 자들의 커밍아웃

이 기획은 현재 한국에서 성소수자 내지 동성애자의 느슨한 대체어로 사용되는 퀴어가 어떻게 인식론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마련되었다. 또한 퀴어가 난해한 학계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실개입적 운동과 관계 맺는 정치학임을 주장한다. 특히 ‘앞서가는’ 미국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친절하게 주석을 다는 글이 아닌, 현장에서 돌출되는 문제의식들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 중인 석박사, 활동가들의 질문‧주장하는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바이섹슈얼 인식론과 동성결혼 ②인권거버넌스와 퀴어정치 ③퀴어-페미니즘 ④겁먹은 자들의 커밍아웃

 

 
 

겁먹은 자들의 커밍아웃

마쯔 / 완전변태 회원

올해 11월,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한 성소수자 친구가 자살했다. 그의 죽음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충격과 슬픔에 잠겼고 함께 그를 추모했다. 현재 한국의 성소수자에게 죽음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살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죽어버린 이들의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경험하고 있거나, 앞으로 경험할 것을 예감하는 폭력과 차별 앞에서 겁먹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겁먹는 것은 자신이 당할지도 모르는 폭력 때문만이 아니며, 이렇게 또다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너와 함께 커밍아웃하기

친구가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었다.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KSCRC>는 “우리는 추모한다, 그리고 존재한다”라는 슬로건으로 해시태그 운동을 진행했다. 슬로건은 역설적으로 상실을 통해 존재를 알리고자 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죽은 이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커밍아웃이라면, 이것은 죽은 자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의 커밍아웃이었다. 이 커밍아웃은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실한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작동하고 있었다. ‘나’가 아닌 ‘내가 잃어버린 너’에 대해서, 지금 존재하는 이가 아니라 부재하는 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커밍아웃이 작동하고 있었고, 이때의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로 제한되지 않는 열린 범주로서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커밍아웃은 통념상의 커밍아웃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달랐다. 커밍아웃은 일반적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이때 드러나는 존재는 ‘진정한 자신’인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재현한다는 것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나는 성소수자입니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커밍아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기표와 기의는 서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기에, 성소수자라는 기표에 개개인의 욕망과 실천은 온전하게 담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다른 언어적 실천처럼 커밍아웃은 불가능한 재현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커밍아웃의 한계, 불가능성은 종종 망각되고는 한다. 마치 커밍아웃을 통해 실재하는 무언가가 등장하는 것처럼, ‘진정한 나’인 성소수자가 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반면에 추모를 통한 커밍아웃은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와 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너’를 내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은 이는 답할 수 없기에 이 재현이 실패할 것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추모를 통한 커밍아웃은 본래 커밍아웃이 빠지기 쉬운 ‘진정한’ 자기 재현의 착각에서 벗어나기 쉬운 것이다.

벽장의 안과 밖 그리고 두려움과 용기

한편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벽장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때 벽장 밖으로 나가는 것은 폭력과 차별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되며, 따라서 용기 있는 행위로 여겨진다. 실제로 커밍아웃은 용기 있는 행위이자 정치적 실천이다.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은 서로를 확인하고 관계를 형성하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를 등장할 수 있게 만드는 주요한 힘이다. 하지만 커밍아웃이 오로지 용기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애당초 용기와 두려움은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폭력의 예감>을 쓴 도미야마 이치로는 20세기 초 일본의 징병 거부와 반전평화 운동이 죽음을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죽음을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용기 있는 운동이 생겨날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두려움과 용기가 정반대의 감정이 아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폭력에 대한 예감을 통해 두려움을 느끼고, 이를 통해 폭력에 맞선 용기 있는 활동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감정이다. 하지만 종종 커밍아웃에 대한 담론에서 두려움이 삭제되고 용기만이 남는 것을 보게 된다. 용기 있는 주체로서 커밍아웃한 사람(오픈)이 등장하고 그렇지 못한 비겁한 주체로서 커밍아웃하지 않은 사람(은둔)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와 비겁함의 구분은 전자의 사람에게만 정치성을 부여한다. 즉, 용기 있게 커밍아웃한 주체만이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실제로 ‘용기’를 지닐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성소수자’로서, 정치적 주체로서 재현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추모를 통한 커밍아웃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감정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곳에서 두려움은 도저히 삭제될 수 없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죽음 앞에서, 죽음을 야기한 폭력을 예감하는 사람들의 커밍아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겁먹은 자들의 커밍아웃은 특정한 주체에게만 정치적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상실과 고통에 괴로워하고 겁에 질린 모든 이들을 정치적 애도의 장으로 초대한다. 여기서 ‘우리’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지 않고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고통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둔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매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향후 한국의 주요한 인권 이슈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부재하게 되는 이들이 누구인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커밍아웃이며, 이러한 커밍아웃을 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면, 그 용기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즉, 제한된 성소수자만이 재현되고 이것이 모든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인 커밍아웃을 용기와 의지의 언어가 아닌 두려움의 언어로 해석하고 부재한 이들의 자리를 삭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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