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연속기획: 사회적인, 너무나 사회적인

‘사회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나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CSR(기업의사회적책임)이나 CSV(공유가치창출)를 경영 윤리 삼아,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같은 기업 조직들이 가동되고,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로 물류가 순환되며, 사회책임투자와 사회혁신채권을 통해 자금이 조달된다. 일상생활은 마을만들기를 통해 공동체 지향적으로 재조직되며, 나아가 도시적 삶 역시 도시재생을 통해 부흥된다. 본 기획은 4회에 걸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설 거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인 것’의 관행들에 이론적·정치적 쟁점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는 극복가능한가 ② 이 운동들은 왜 중간계급 편향을 보이는가 ③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가능한가 ④ 좌파와 우파는 어째서 대립하지 않는가

 

새로운 위기관리, 또는 포스트-워싱턴-컨센서스

김성윤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1990년대 후반, 영국‧미국‧독일 등에서 ‘제3의 길’이란 말이 유행하고 세계은행 수석부총재로 스티글리츠가 취임하면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발원조 패러다임에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국제적 구제융자의 대가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패키지였다면, 이때부터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사회 영역 활성화와 민주주의적 정치 관행 도입 등이 새로운 처방전으로 추가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방글라데시에서 마이크로 파이낸스라는 빈곤 축소 프로그램이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도 이 같은 전환에 촉매 구실을 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 다보스 포럼에서도 지역공동체와 환경 이슈 그리고 노동자를 아우르는 것(이해관계자 이론)이 장기 수익성에 이롭다는 인식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와 대별하여 ‘포스트-워싱턴-컨센서스’라고 이름 붙였다. 로스토우 등이 주도했던 근대화 이론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신발전경제학’이 출현했다는 분석이 제출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매킨지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듯 이런 식의 ‘사회서비스’가 향후 시장경제의 ‘신성장동력’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만큼 글로벌에서 로컬한 단위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에 사회적인 것을 접붙이려는 시도가 사회운동과 지적 프로젝트를 아우르면서 포괄적으로 나타나는 중이다.

사회적 삶의 위기와 수익성의 위기를 동시에 관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시장에 사회적 책임을 지우는 한편 시민사회의 자조와 협동을 독려하는 방안을 핵심으로 삼는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을 포함하여 영미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사회정책 패러다임이 더 이상 질적인 차이점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노무현이 사회투자국가를 천명할 때 이명박이 사회적 기업을 진흥하고, 박원순이 마을만들기를 하는 동안 박근혜가 제2의 새마을운동을 벌이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추진 전략에서도 (뉴)거버넌스를 명목으로 민간 전문가 집단에 사회사업을 위탁함으로써 관료주의의 위험을 방지하겠다는 관점을 공유하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흐름을 주도한 ‘신중도좌파’들에게 이러한 관점 전환은 역사적 궁지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케인스주의 체제의 한도가 다한 시점에서 수익성의 위기를 돌파했던 신고전주의 경제학 전략을 완전 폐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멸적 효과에 대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사회적 국가 형태로 회귀할 수는 없는 곤란 같은 것들이 이들을 억눌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내린 해답은 결국 이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시장과 시민사회.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국가-시장-시민사회로 이뤄진 새로운 위기관리 구성체가 실제로 상호대칭적인 규범적 균형을 창출할 수 있을까. 지배 블록과 중간계급 사이에 맺어진 이 새로운 ‘대타협’에서 노동계급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민들이 사회적인 것을 위해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여민주주의의 징표인 걸까, 아니면 시민들이 위기관리에 동원되는 새로운 ‘총동원체제’를 의미하는 것일까. 나아가 시장이 위기관리 전선에 나선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기조정적 시장’의 완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결국, 지금의 위기관리 구성체는 그것이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더 큰 위기의 불씨를 떠안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만큼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저 스스로 헤게모니화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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