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영화, 지금 여기

-『21세기 한국 영화와 네이션』 저자 손희정 인터뷰 

 

- 발터 벤야민은 “연극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역사의 반향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했다. 연구자도 이 같은 맥락에서 네이션이란 “유동적”이고 유기적이라는 해독을 했다. 이런 논지를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논문 요약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한국 영화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네이션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네이션이란 어떤 고정된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성격과 내용을 조정해 온 유동적인 상상력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나의 독창적이고 고유한 발견은 물론 아니다. 이미 기존의 민족/네이션에 대한 작업들에서 충분히 다루어져 온 관점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내셔널시네마에 대한 영화학 연구 및 한국에서 민족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변화되어 왔는가에 대한 계보학적 작업들에서 영향을 받았다.

 

- 먼저, 토론자가 제기한 “‘리셋에의 욕망’을 새롭게 떠오르는 한국적 네이션으로 볼 수 있는지”의 논의에 답한다면.

“헬조선과 죽창”이 보여주는 것은 청년 세대의 깊은 좌절이다. 그것은 논문에서 다루고자 했던 우리 시대의 폐소공포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일종의 ‘망했다’는 감각인데, 이는 편재하는 자본의 외부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해결책 없음, 희망 없음, 따라서 미래 없음이라는 일종의 3무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좌절 상태에서 우리는 차라리 세계의 파국을 원한다. 그것이 ‘리셋에의 욕망’일 터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어떤 ‘공동체 감각’으로서의 새로운 네이션을 형성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상상하기 힘든 완전히 파편화된 개인을 만들어 낸다고 본다. 이는 물론 집합적으로 당대 네이션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행보를 보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헬조선과 죽창”이 결국에는 “노오오오력”이나 허무주의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리셋에의 욕망’이 결국 무엇에 복무하게 될지는 명백하다. 그건 지금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에 더 무능하기 때문에 더 강력해질 자본주의다.

 

- 한국 사회에 어소시에이션의 희망은 있다고 보는가.

애초 기획할 당시에 논문의 목표는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영화-사건’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세계의 규범을 뒤집고 ‘진리’에 충실할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 내는 영화적 사건이란 무엇인지 규명하고 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걸 할 수 있는 비평이야말로 자본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반려’(권명아)를 조직하는 ‘반려의 미디올로지’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지금 우리는 ‘망한 상태’에 놓여있고, 결국 당대 비평의 임무 혹은 비평의 윤리적 태도란 이 ‘망한 상태’를 제대로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내가 도달했던 결론이었다. 지금으로써는 그 재현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 성급하게 느껴진다.

 

- 한국 상업 영화가 점점 탈각시켜 가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러 가지를 답변으로 내놓을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정리해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나는 단연 ‘상상력’이라고 대답하겠다. 지금 한국 상업 영화의 상상력은 무엇보다 게으르다. 반복되는 이야기와 반복되는 이미지가 암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복되는 세계관 속에 갇혀있는가다. 그리고 이런 게으름은 새로운 상상력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더불어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 역시 지연시킨다.

정우정 편집위원 | jeongwj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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