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 영화학 박사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학원, 그 공간 안에서 원생들은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할까? 본 기획은 대학원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지 소개하고, 토론지면을 마련하여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에는 첨단영상학과 손희정의 박사 논문을 통해 한국 신자유주의 시대 영화 텍스트에 나타난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 네이션의 변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적 네이션은 무엇의 표상인가
원우연구: 『21세기 한국 영화와 네이션』 손희정 著


손희정 / 영화학 박사


더 이상 민족주의는 유효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들 한다. 예전과 달리 일상에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며,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영화 <명량>(2014)은 천칠백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지만 거북선이나 팔만대장경의 위대함이 대단한 자긍심의 원천이 되지도 않는다(영화에서 심지어 거북선은 중간에 불타버린다). 경제적 이유로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2015년 기준 천만을 넘긴 한국 영화 13편 중 8편이 ‘민족의 역사’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3), <실미도>(2003), <왕의 남자>(2005),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변호인>(2013), <명량>, <국제시장>(2014), <암살>(2015). 어떻게 된 일일까? 전통적인 민족의 관념은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라는 공통 감각을 구성하는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민족은 이처럼 건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1세기 한국 영화와 네이션>은 ‘nation’을 ‘민족’이 아닌 ‘네이션’으로 번역할 것으로 제안하고, 이를 통해 유동적으로 변신하고 변화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변태 속에서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을 탐구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실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폐기될 수 없는 상상‘력’이다.

 영화 <명량> 중
 영화 <명량> 중

문제의식의 시작은 물론 영화였다. “각 민족의 역사는 영화사 자체의 궤도를 결정한다”(김경현)는 이론적 통찰에 기대지 않더라도, ‘네이션’이 한국 영화 논의에서 핵심적인 논점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거칠게 나열해 보자면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 식민지 조선인들과 만났던 방식, 해방 직후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던 광복영화들, <아리랑>이 한국 영화사에 특수한 사회적 리얼리즘 작품으로 정전화된 과정, 1950-60년대 반공 영화에서 보이는 남한 중심 민족 공동체의 상상적 복원, 1980년대 반체제 영화 담론으로서 ‘민족영화론’의 등장, 199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내셔널시네마, 스크린 쿼터 논의와 일본영화 개방 논쟁, 그리고 당대 한국 영화 논의를 지배하고 있는 한류 패러다임에 이르기까지. 네이션은 그야말로 텍스트와 담론뿐 아니라 산업과 정책 등의 제도적 차원을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한국 영화(the Korean Cinema)를 추동한 중심 회전축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층위에서 등장한 네이션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조정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유동적인 관념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 영화라는 장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조정되고 있는 네이션을 목도할 수 있다. 네이션이란, 호미 바바가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야누스의 얼굴’을 한 양가적 서사이고, 영화는 그 서사가 구성되고 또 펼쳐지는 주요한 장이기 때문이다. 이 양가성은 무엇보다 네이션에 부여된 어려운 임무, 즉 근대 ‘국민국가’ 자체에 내재하는 상호 길항하는 가치들의 종합이라는 임무에 놓여있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이 통찰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과 국가(스테이트)라는 통약 불가능한 영역과 그 가치들을 자본-네이션-스테이트로 종합하여 이 고리들 사이의 불안정한 연결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네이션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리고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네이션은 유연하게 그 성격을 조정한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자본과 스테이트의 관계가 유동적으로 변화해 온 탓이다. 예컨대 발전주의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스테이트의 역학 관계를 생각해 보라. 전자에는 스테이트의 고리가, 후자에는 자본의 고리가 더 비대하지 않은가? 그랬을 때 발전주의 시대의 ‘민족(네이션)’ 감수성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민(네이션)’ 감수성은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영화에서 네이션은 때로는 ‘시원적 민족’을 지향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를 지지하는 ‘역사적 국민’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등,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션의 성격은 유동적이지만 네이션의 역할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우리/공동체’라는 모호한 관념을 짜는 정치적 상상력(네이션)이 펼쳐지는 장으로서의 영화가 당대의 전지구적 지배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의 효과적 장치로 작동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21세기 한국 영화에서 등장하고 있는 네이션은 ‘자유주의적 호모내셔널리티’, 즉 자본주의와 그 자본주의의 정치적 판본인 자유민주주의의 외부를 상상하지 못하는 남성중심민족의 성격을 띤다.

영화 <설국열차> 중
영화 <설국열차> 중

본 논문은 앤더슨주의의 영화학적 수정을 경유해 당대 네이션의 성격을 포착하고자 했다. 릭 알트만은 “앤더슨은 네이션이 형성되던 그 순간에 집중하고 거기서 멈춤으로써, 그가 묘사했던 과정의 지속성이라는 본질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하면서 영화학이 앤더슨주의를 수정할 것을 요청했다. 즉, 네이션이란 단순히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영화를 비롯한 현대의 대중매체는 네이션의 조정과 재규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네이션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주요 공간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모니터, 스크린, 브라운관, 스마트폰 등 다양한 윈도우 안에서 가능해진 가상공간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네이션 형성에 개입하는 중요한 매체일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자유주의적 호모내셔널리티가 이 다양한 윈도우를 가로지르며 어떻게 형성되고 공고해지는지 영화, 드라마, 인터넷 등을 아우르며 분석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퓨전사극은 시원적 네이션의 역사라는 거대담론으로부터 벗어나 역사를 탈근대적인 인식론 안에서 자유롭게 재창조하면서 작은 이야기들과 작은 관심사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인 이야기 소비양식(아즈마 히로키)을 보여주지만, 이런 탈근대적 이야기 소비양식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에는 ‘공유된 과거’로서의 시원적 네이션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존재하는 점에서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이 퓨전사극들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적 에토스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절이자 스펙터클이었던 ‘노무현 서거’와 그를 둘러싸고 펼쳐진 애도의 문화정치의 자장 안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포스트-노무현기 퓨전사극’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문은 한국 사회의 네이션에 대한 감각의 변화 속에서 한국 영화의 중요한 서명(signature)이었던 ‘민족적 알레고리’(프레드릭 제임슨)가 해소되고, 이 민족적 알레고리를 대체하는 정치적 알레고리로서 지구화된 시대의 일종의 보편 감각인 ‘교착의 국면에 대한 감각’이 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논문의 중요한 관심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역사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 이후 ‘출구 없음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10년의 진보정권은 신자유주의화를 강화해왔다. 그리고 2007년 MB정권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함으로써 우리는 교착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또 그렇게 상상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전지구적인 파국의 전조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2007년 이후의 한국 영화들, 즉 교착 시대의 한국 영화들은 이런 역사적 국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 등장하는 일종의 폐소공포증은 교착적 국면이 야기하는 호흡 곤란이 새어 나오는 균열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알레고리가 세계 영화제 회로에 소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전지구적 시각장에서 한국 영화를 둘러싼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를 다시 사고해야 할 시점이 되었음에 대한 강력한 시사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폐소공포증과 그 공포증을 경험하면서 ‘스놉’ 혹은 ‘동물’이 되는 인물을 선보이면서 서구 시네필에게 소구되었던 일련의 단편영화(가령 <남매의 집>(2009), <세이프>(2013)),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을 상업영화의 장으로 확장시켰던 <설국열차>(2013)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때 <설국열차>는 당대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하는 급진적인 서사를 선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욕망의 구조를 물적 토대에서뿐만 아니라 서사적 구조 안에서도 깨고 나오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좌파적 급진성을 그저 하나의 스타일이자 상품성으로 장착한 상품에 머물게 되는데, 그렇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스놉-영화’의 전형이 된다.

이 지난한 논의 끝에 본 논문이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지배적 체제가 양산하는 모순 및 죽음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일상에서의 변화와 실천을 통해서 그 욕망의 구조를 바꾸어가는 것이라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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